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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Oct 20. 2023

31개월 배변훈련 보고서

결론은: 이사갑시다.

*주의: 배변훈련을 검색해서 들어오신 분들은 필요한 정보가 없습니다.


우리집 아님. 출처-픽사베이


내 삶의 대부분을 보낸 고향의 그 집은 할아버지가 지은 3층짜리 다가구 주택의 3층 집이었다. 넓은 거실이 있고 방이 3개, 화장실은 2개가 있었다. 그 집에 많게는 10명이 적게는 4명이 살았다. 그럼에도 활동시간이 다 달라서였을까 집이 북적였던 기억은 크게 없다. 언니와 방을 같이 쓰다가, 동생과 잠깐 같이 쓰다가, 나만의 방에 침대가 생기면서 엄청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서울로 처음 올라왔을 때 구했던 묵동 집은 옥탑에 있는 아주 작은방이었다. 집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았다. 방은 작았지만 이상하게도 화장실이 방보다 더 커서 내 방에 오던 사람들이 웃어댔다. 말도 안 되게 작은 그곳에 생각보다 많은 값을 치르고 2년을 살았다. 빨래 건조대를 펴 놓으면 내가 서 있을 수도 없고 침대 바로 옆이 싱크대였던 그 집, 아니 그 방에서 잠들 때마다 나는 다짐했다. 다음 집은 주방과 방이 분리된 곳으로 이사 가야지! 월급을 받으면 주방과 방이 분리된 어느 원룸을 꿈꾸며 열심히 모았다.


전세 만기가 되어 이사할 집을 열심히 찾아다녔고 지난 2년 동안 꿈꿨던 '주방과 방이 분리된 집'을 드디어 찾았다. 지난 집보다 보증금을 더 내야 했지만 그간 모은 돈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많이 낡은 곳이었지만 어차피 2년 살 집이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방문을 닫아도 음식 냄새가 조금 들어오긴 하지만 어쨌든 싱크대와 침대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좋았다. 지난 집(아니 방)이 화장실이 말도 안 되게 컸던 것에 비해 여긴 엄청나게 좁았지만, 빨래 건조대를 놓아도 움직일 공간이 충분했기에 만족했다. 내가 2년간 꿈꿔왔던 집에 왔다는 것이 뿌듯했다. 첫 자취방의 보증금은 당시에 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셨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모은 돈으로 어느 정도 갚아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나의 작은 성취였다. 그곳에서 잠들며 나는 또 다짐을 했다. 다음은 ... 방이 2개였으면 좋겠다!


그러다 결혼을 했다. 신혼집을 구하는 일이란 참 어려웠다. 매매를 하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전셋집으로 알아봤다. 2명이 살 집이기 때문에 조건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대중교통만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 남편이 역에서 집까지 찾아오기 쉬운 위치에 있어야 하고, 방은 2개 또는 3개, 예산도 맞아야 하고, 융자는 없고, ... 등등등. 이리저리 동네의 범위를 넓혀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았다. 방이 2개, 화장실이 1개이고 거실이 있는 빌라였다. 지난 2년간 꿈꾸던 집을 찾았다! 비록 내 집은 아니지만 내가 빌린 것들 중에 가장 비싼...! 거실에 소파도 놓아본다. 그렇게 달달한 신혼을 보내며 또 다짐했다. 다음은 ... 화장실이 2개야!


그곳에서 2년을 살고 지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키웠다. 지난 집들이 2년만 살고 떠났다면 이 집에서 꽤 오랜 시간 살고 있다. 이곳도 방이 2개이고 화장실이 1개이다. 단칸방에서 시작했던 내 서울 살이의 터전이 점점 넓어졌다. 원룸에서 분리된 원룸, 방이 2개였던 빌라, 그리고 방이 2개인 아파트 ... 다음은 분명 화장실이 2개인 곳일 테다!


하지만 사람들이 참 당연하게도 말하는 '국평'의 집을 얻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가 생겼기에 이제는 고려할 것이 더 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 남편이 역에서 집까지 혼자 찾아올 수 있을 만큼 가깝거나 길 컨디션이 좋아야 하고(-바꿔 말하면 역세권), 아이들 다닐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가 있어야 하고(-바꿔 말하면 학군), 방이 3개에 화장실이 2개인, 그리고 무엇보다 예산에 맞는 아파트 ...는 없었다. 모든 조건이 채워져도 마지막 예산에서 막혔다. 대출이라는 방법이 물론 있지만 이자를 내며 한 달을 살아가는 문제도 고려해야 하기에 무턱대고 큰돈을 빌릴 수도 없었다. 서울살이 10년째, 점점 넓어지던 나의 터전이 여기서 과연 멈출 것인가...!


그럭저럭 살고 있는 곳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그때, 나와 남편에게 이사 의지를 불러일으킨 것이 있다면 바로바로 31개월 딸이다.



아들도 36개월쯤 배변 훈련을 했기에 이번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딸이 갑자기 변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배변훈련이 시작됐다. 10월 들어서며 시작한 배변훈련이 보름쯤만에 완료되었고 이젠 팬티 입는 언니가 되었다며 으쓱으쓱한다.



문제는 나와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가 있으면 딸과 아들이 번갈아가며 문을 두드려댄다는 것이다. 특히나 화캉스(화장실 바캉스)를 즐기는 남편에게 아주 고역인 일이었다. 몇 번이고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나와 남편은 화장실 나올 때마다 "이사가자!!!!! 화장실 두 개!!!!"를 외쳤다. 주말마다 아이들에게 동네 구경 가자고 하면서 몇 개의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사 갈 곳을 알아보기도 했다. 모든 조건에 다 맞지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다 싶다가도 예산에서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화장실 하나를 포기하고 방만 한 칸 더 늘려볼까?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이들의 노크 소리에 다시 네이버 부동산에서 집을 찾아본다.


어딘가 있겠지, 그리고 분명 갈 테지. 지난 서울살이가 말해주고 있다. 분명 다음은 화장실 2개인 집이야!!!!! 기필코 내 응가 시간을 확보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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