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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Sep 23. 2024

시각장애인과 은행가기

7월 중순에 청약에 당첨됐다. 멀고도 먼 내집마련의 길. 은행이 마련해 줄 내 집... 이를 위해 은행에 방문해야 할 날이 왔다.

공동명의 신청하는 날이 평일이라 (계약서 쓰는 날은 다행히 방학..!) 조퇴하고 급히 갔다. 연가 쓰기도 어려운데 중도금 대출 때는 어쩌나 했는데 이번 대출 신청 일정이 일요일부터 시작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또 애들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 돌봄 MOU를 체결한 언니네에 잠시 맡기고 다녀올 수 있었다! 처음엔 언니네가 일정이 있어 아이들을 데려가야지 싶었는데 어후 데려갔음 제정신으로 못 나왔을 듯 하다.

일정 확인부터 시작하여 서류 목록을 확인하며 빠진 것은 없나 싶어 확인하고 또 하고... 뭔들 안 그럴까 싶지만 특히 서류 관련 일은 나에게 일임하시기에 오롯이 나의 일이라 더 신경을 썼다.

아 그러면 남편은 무얼 하나? 무얼 했나?

가장 큰 일이자 유일한 일이라 한다면 그의 이름으로 당첨되었다는 것..... 그 서류도 내가 써냈지. 계약서 쓰러 가서도 팔 빠지게 주소 쓰고 이름 쓰고 한 건 나고 이런저런 서류를 준비한 것도 나다. 공동명의 서류 때문에 구청 갔는데 왜 여길 왔는지도 몰랐으며 뭔지도 모르고 겁도 없이 인감도장을 내밀고 말이야! 아무튼 심봉사(사실은 김봉사) 데리고 다니느라 진 빠졌네.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 봉사님 없었으면 집도 마련 못했을걸. 근데 봉사님은 나 없었으면 돈 없어서 그 집 못 샀어. 그러니 윈윈이지 뭐.

그러니 나에게 명의 반을 떼어준 걸 억울해하지 말라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은행에 도착했더니 우리 앞에 벌써 30명 정도 서 있었다. 9시에 시작이었는데... 모두 마치고 나오니 11시 20분이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오후를 넘길 뻔했다. 신청 첫날이다 보니 직원들도 우왕좌왕했고 정신이 없었다. 운영에 불만이 있었지만 어찌 됐든 잘 끝났다. 당분간은 신경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부디)




시각장애인 남편과 은행을 가면 내가 참 바쁘다.  본인이 직접 작성을 해야 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함께 간 내가 거의 다 써주는 편이고 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방문한 은행에서, 직원(파견 나온 대출상담사)에게 조금 감동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은행을 가면 그의 업무를 위해 방문했음에도 직원은 그가 아닌 나에게 그 설명을 했다. 옆을 가리키며 이 분께 말씀드리라 해도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서 언젠가부턴 옆에 앉아 눈을 깔고 있다. 눈을 마주치면 자꾸 나에게만 시선을 주기에.. 이렇게 하면 그제야 남편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간다. 사실 그런 시선이 싫고 뭔가 정말 '도와주시는 분/자원봉사자/활동보조인'(실제 들은 말... 아닌 건 아니지만 호호)이 된 것 같아서 남편만 창구로 보낸 적도 있는데, 묘한 불친절함을 보고만 있는 것도 힘들어 이제는 그냥 옆에 앉는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직원은 '금액과 서명은 계약자님(남편)이 쓰시고 다른 부분은 보호자인 나에게 부탁하겠다'라는 말을 먼저 하면서 양해를 구했고, 남편에게 설명할 내용은 남편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지금껏 함께 은행을 다니며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대학생 때도 시각장애인 선배들과 은행에 종종 다녔다. 수기로 작성하는 신청서 등이 많은 공공기관이나 은행 같은 곳은 시각장애인들의 접근성이 아직도 좋지 않다. 거기다 직원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낮다 보니(무시한다기보다는 그들이 방문했을 때 어떻게 대하는지, 업무처리를 어찌해야 하는지 몰라서 모름.) 원하는 업무를 처리하는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보호자 없이 방문해도 업무처리에 어려움이 없는 어느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그리고 이런 곳에 방문할 때는 남편더러 케인(흰 지팡이)을 꼭 챙기라 한다. 케인을 들고 있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시각장애인이에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 이번에도 케인을 챙겼다. 나랑 같이 걸을 땐 안 쓰는데 은행 업무 끝나고 나오자마자 착착 접어 다시 가방으로. 장애인에게 짐을 지울 순 없지 하고 내가 들고 있던 접이식 의자도 남편에게 다시 넘김 호호. 나야 나 뺑덕.  


결혼 8년 만에, 아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편과 내 이름으로 큰 빚이 생겼다. 연대보증인으로서 의무를 충실히 하겠소. 열심히 벌고 모으고 갚자.


참! 중도금 대출 시 장애인 가구는 HUG 보증료 할인 대상이니 장애인 증명서를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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