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한때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였던 중국. 20세기 중반, 중국은 냉전이라는 세계 질서 속에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모두와 등을 지며, 철저히 단절된 시간을 보냈다. 이 고립의 상징이 바로 '죽의 장막(Bamboo Curtain)'이다. 그리고 고립을 깨고 세계 중심으로 도약하는 중국을 이끈 실용주의 철학이 바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었다.
이 두 개념은 단지 중국의 과거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아니다. 오늘날 국제 사회와 경제의 변화를 읽어내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이 새로운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만에 피신한 국민당 정부를 합법 정부로 간주하며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이로써 중국 본토는 국제사회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을 완전한 적대 관계로 만들었고, 이후 중국은 이념적 유사성을 지닌 소련과도 갈등을 빚었다. 1960년대 중소 분쟁, 특히 1969년 우수리강 국경 충돌은 공산 진영 내부에서도 중국이 고립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급자족 노선을 택했다. 무리한 공업화 정책인 대약진운동은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초래했고, 문화대혁명은 외부와의 모든 문화적 접촉을 차단시켰다. 서방 언론은 중국을 '죽의 장막 뒤의 미스터리한 공산국가'로 묘사했고, 그 표현은 국제적으로도 정착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197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벌어진 미국과 중국 선수들의 우연한 교류는 양국 간의 긴장 해소에 불씨를 제공했다. 이른바 '핑퐁 외교'는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고, 이는 1979년 공식 수교로 귀결되었다.
같은 해,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은 본격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선언하며 고립된 공산국가에서 세계 경제의 일원으로 중국을 전환시킬 준비에 나섰다. 이로써 죽의 장막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중국은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덩샤오핑이 개혁의 기초로 삼은 사상은 단순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이는 단지 속담이 아니라, 이념을 뛰어넘는 실용주의적 정책 기준을 제시하는 선언이었다.
흑묘백묘론은 사회주의 순수성보다 민생과 실용을 중시하는 철학이었다.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요소도 거리낌 없이 수용하며, 시장 경쟁 원리를 점진적으로 도입했다. 선전, 샤먼 등의 경제특구가 설치되었고, 농민에게 생산 자율권을 주는 '가계 책임제'가 도입되었다. 이후 국유기업 개혁과 민영화도 단계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는 수치로 증명된다. 1978년 1인당 GDP는 180달러에 불과했지만, 2020년에는 1만 달러를 넘어섰다. 8억 명이 넘던 절대 빈곤 인구도 4천만 명 이하로 줄었다. 수출 규모 역시 100억 달러에서 2조 5천억 달러 이상으로 급성장하였다. 흑묘백묘론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현실을 바꾼 전략이었다.
하지만 모든 변화에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이념을 유연하게 대했던 만큼, 보수 강경파의 반발도 컸다. 무엇보다 시장 중심 성장 과정에서 지역 격차, 빈부 격차, 부패와 환경오염 같은 부작용도 심각해졌다. 이는 시진핑 정부가 ‘공동부유’를 새로운 기조로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묘백묘론은 오늘날까지도 중국 정책의 기조로 자리하고 있다. 실용주의는 이념보다 국민의 삶을 앞세우는 철학으로, 21세기 중국의 눈부신 성장 이면에 자리한 핵심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죽의 장막은 한 국가가 외부와 단절된 채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고, 흑묘백묘론은 그 단절을 넘어서려 했던 실용주의 철학의 구현이었다.
이 두 개념은 과거 중국의 이야기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고양이’를 선택하고 있는가? 이념에 갇히지 않은 정책, 국민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선택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이며, 시대를 이끄는 리더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