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로 가보자! 프랑스 파리 전시회 참가(5)
전시회 마지막 날 아침. 파리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도현의 마음은 어제와 달랐다. 마티유 드랑과 장 베르나르와의 저녁 식사는 도현에게 며칠 간의 낯설고 긴 여정을 지나 이제야 이 땅에서 ‘무언가’를 붙잡은 듯한, 그리고 성취한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효진은 전날 밤 새로 정리한 샘플 박스를 부스로 옮기며 숨을 고르다 말했다.
“드디어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요. 사실, 전시 셋째 날에는 큰 성과가 없다고 하던데, 그래도 뭔가 기적처럼 한 건이 더 있었으면 좋겠네요.”
도현은 상담 테이블에 놓인 샘플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적은... 우리가 만드는 거니까요.”
효진은 손끝으로 박스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근데요... 사실 어제 지우 씨가 스탠드 위치 하나 바꾸고, 박스 하나 세워 준 것만으로도 바이어가 멈춰 선 것을 보고 조금 놀랐어요.”
“그러게요. 결국, 이러한 작은 것들이 큰 차이를 만드는 건가 봐요.”
“완전 동의해요. 괜히 괜찮은 브랜드가 괜찮아 보이는 게 아니었어요. 작은 디테일이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이번에 제대로 배웠어요.”
효진은 시선을 부스 앞쪽 대형 모니터에 잠시 두었다가 말했다.
“다음번에는 제가 직접 전시회 참가 기획안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도현은 효진의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땐 효진 씨 이름이 앞에 쓰여도 괜찮을 만큼 잘해봅시다.”
효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저희 브랜드, 다시 파리로 올 수 있겠죠?”
도현은 태블릿 화면을 조정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반드시 올 거예요. 그땐 더 크게, 더 당당하게. 그리고 미국, 영국, 두바이 등 다른 곳으로도 가야죠.”
부스 세팅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익은 인물이 조용히 다가왔다.
“Bonjour, Mr. Kim.”
(봉주르, 김 대표님.)
마티유 드랑이었다. 도현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Mr. Dran, it's great to see you again. I really enjoyed our time together yesterday. And the night streets of Paris… they left me speechless.”
(미스터 드랑,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어제 함께한 시간이 무척 즐거웠어요. 그리고 파리의 밤거리… 정말 말문이 막힐 정도로 좋았어요.)
“Likewise. I actually came to ask something simple.”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오늘은 간단한 걸 하나 여쭙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는 웃으며 제품 하나를 가리켰다.
“This skincare set… is it available for small-batch retail test in Paris? Maybe 500 units?”
(이 스킨케어 세트… 파리에서 소량 리테일 테스트용으로 제공받을 수 있을까요? 대략 500개 정도?)
도현의 눈이 커졌다. 명확한 첫 주문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샘플 테스트를 위한 초도 물량치고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Of course. We can prepare that right after the exhibition. Should I arrange shipping through our forwarder?”
(물론입니다. 전시회 종료 이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저희 포워더를 통해 배송을 진행해 드릴까요?)
마티유 드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Let’s talk tomorrow. I hope you will stop by my office to finalize the contract. If all is good, we start with this.”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 나누죠. 계약 마무리하러 저희 사무실에 들러 주시겠어요? 모든 게 순조롭다면, 이 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Your product stood out not just for the product like a formula, but for how you told the brand story yesterday. That matters more than you think.”
(당신의 제품이 돋보였던 건 단지 포뮬러 같은 제품 때문만이 아니라, 어제 전달한 그 ‘브랜드 스토리’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도현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는 부스를 떠났다. 기석이 도현의 곁에 와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초도 물량치고 적지 않습니다. 이건 상당히 좋은 시그널입니다. 유럽 바이어는 말없이 멀어지기도 쉬운데, 저 사람은 계속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초도 거래로 시장성이 확정된다면, 추가 주문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도현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첫발을 내디뎠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렇게 나른한 오후가 지나가고 있을 무렵, 또 한 번 익숙한 그림자가 부스 앞으로 다가왔다. 검정 재킷,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 어제도 방문했던 일본계 바이어, 미나 하라다였다.
“Third time’s the charm, isn’t it?”
(세 번째 만남이면 이제는 인연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는 특유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도현은 놀라움과 함께 어쩐지 익숙한 반가움을 느꼈다.
“Ms. Harada. It’s an honor to have you back, again.”
(하라다 님. 다시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하라다는 부스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I don’t usually come back this many times. But I’ve been thinking something about your products… they linger.”
(이렇게 여러 번 다시 찾아오는 일은 드문데...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나더군요. 당신네 제품에는, 뭔가 여운이 있어요.)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단정했고, 감정은 절제되어 있었지만, 도현은 그 안에서 흥미 이상의 끌림을 읽어냈다. ‘linger’ 그 단어가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미나 하라다는 이번엔 제품 설명서도 보지 않고, 라인을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가듯 스캔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If I visit Korea after several weeks for a conference, would it be possible to come by your office?”
(몇 주 후 회의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게 되면, 귀사 사무실에 잠시 들를 수 있을까요?)
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Pardon? Ah… of course! We’d be more than happy to welcome you. Please feel free to share your schedule.”
(죄송합니다? 아… 물론이죠! 당연히 환영합니다. 편하신 일정으로 말씀만 주세요.)
미나 하라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 지갑을 꺼냈다. 명함 뒷면에는 날짜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The date, Tentative.”
(한국 방문 일정이지만, 아직은 잠정적이에요.)
그녀는 짧게 말하고, 다시 한번 제품을 둘러보며 조용히 부스를 나섰다. 그 모습이 멀어지자,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던 효진이 도현에게 말했다.
"저분, 벌써 세 번째 방문 아니에요?"
그리고 기석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 세 번 방문에, 거기다가 명함에 일정까지 적어준 거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먼저 연락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저희 사무실로 초대하셔야 합니다.”
도현은 여운이 남은 표정으로 명함을 손에 쥐고 있었다.
“느낌이... 좋아요?”
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나 하라다 같은 대형 바이어는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입니다. 절대 가볍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같은 부스, 같은 제품을 보러 벌써 세 번째입니다. 그리고 직접 회사를 보고 싶다는 건, 이미 마음이 기울었다는 뜻입니다.”
도현은 미나 하라다의 명함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정말로 뭔가가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후 4시. 전시가 공식 종료되기 한 시간 전. 관람객의 수는 급격히 줄었지만, 뷰티스타 코스메틱 부스는 여전히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카탈로그와 샘플 박스를 포장하던 중, 효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휴, 진짜 드디어 끝났네요. 모두들, 수고 많으셨어요.”
기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생각보다 성과도 많았고, 무엇보다 값진 것은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확실히 보였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용 노트를 꺼냈다.
“그럼 간단히 부족한 부분을 정리해 볼까요? 다음에는 더 잘하기 위해서!”
효진이 먼저 의견을 말했다.
“브랜드 연출, 영상 하나, 조명 하나가 이렇게 반응을 바꾼다는 걸 느꼈어요. 다음엔 영상 컨셉을 더 빨리 준비해서 테스트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어서 기석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부스 배치나 진열 순서도, 현장 피드백을 기반으로 더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간 활용 전략이 중요합니다."
효진이 이어 말했다.
“언어 장벽도 실감했어요. 다음엔 제품 설명을 현지 언어로 인쇄해서 준비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파리에서는 소매치기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효진의 말에 도현과 기석은 크게 웃었다. 그리고 도현은 모두의 말을 노트에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전시회는 끝났지만, 이건 단지 첫걸음일 뿐이에요. 앞으로 더 멀리 가기 위해, 오늘을 기록합시다.”
기석도 박스를 덮으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했다.
“이건 단지 첫 번째 해외 전시회였을 뿐입니다. 진짜 시작은 두 번째, 세 번째부터입니다. 그땐 우리가 누군지, 확실히 각인시켜 줄 수 있을 겁니다.”
전시회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본격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저녁, 유럽 시장에서의 첫 비즈니스 출장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전시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전시장 전체에 은은하게 퍼지고, 부스 정리를 마친 도현이 박스를 하나씩 덮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를 불렀다.
“대표님.”
도현이 돌아보자, 지우가 서 있었다. 짙은 회색 코트 차림에 작은 노트를 들고 있었다. 어제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과 옷차림이었지만, 눈빛엔 여전히 프로페셔널한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이제 다 끝났죠?”
“네, 조금 전까지 마무리 중이었어요.”
“그래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이번 전시회,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도현은 순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인사인데도, 그 말이 이상하게도 진하게 와닿았다. 그리고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지우를 보자마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긴장과 부담, 희망과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지우 씨가 아니었다면, 우린 이런 반응 절대 못 얻었을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해요.”
지우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단지, 브랜드가 가진 좋은 면을 조금 더 돋보이게 했을 뿐이에요. 그걸 여기까지 끌고 오신 건 대표님과 뷰티스타 팀이니까요.”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전시장 안은 이미 철수 준비로 분주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조금은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지우 씨.”
“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번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진짜로, 뷰티스타의 브랜드 이야기를 같이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우는 잠시 놀란 듯하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도현은 그 미소를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프랑스 파리에서의 전시회는 끝났지만, 이 만남은 분명히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지우가 전시장 출입문을 향해 조용히 걸어 나가고, 도현은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효진이 소곤거리듯 말했다.
“대표님, 방금 영화 같았어요. 마지막 장면처럼 딱.”
효진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도현이 놀라듯 돌아보자, 효진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박스를 들었다.
“물론, 대표님은 아직 엔딩 크레디트 못 봤으니까,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죠?”
도현은 웃으며 마지막 박스를 천천히 덮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손끝엔 전시회의 모든 시간이 고여 있었다. 바람이 전시장 안으로 스며들고, 조명이 하나둘 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