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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술표준 전쟁: 배터리 사례를 중심으로

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by 이설아빠

1970년대 후반, 비디오 시장에 우리가 모르는 전쟁이 있었다. 화질이 더 뛰어났던 베타맥스(Betamax)와, 녹화 시간이 길고 대여점 생태계를 장악했던 VHS의 싸움이었다. 결과는 모두가 알고있는 VHS 기술의 완승이었다. 기술적 완성도보다 시장에 깔린 표준(de facto standard)이 더 강력했다. 이후에도 블루레이와 HD-DVD, LTE와 WiMAX 등 수많은 ‘기술 vs 표준’의 싸움이 반복되었다.


오늘날 그 싸움의 무대는 배터리 산업이다. 한국은 고니켈 배터리(NCM·NCA)로 고성능을, 중국은 LFP(리튬인산철)로 저비용·안전성을 내세워 맞붙고 있다. 한때 한국의 고성능 배터리가 세계를 선도하는 듯했지만, 이제는 중국의 LFP가 시장의 기본값처럼 자리잡아 가는 모습이다.


이 경쟁은 단순한 기술 대결이 아니다. VHS가 그랬듯이, 누가 시장에서 ‘사실상의 표준’을 선점하느냐가 진짜 승부처가 될 것이다.


LFP의 부상, 고니켈의 한계 그리고 ‘표준의 힘’


① 틈새에서 주류로: LFP의 반전 드라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LFP는 “값싼 저가형 배터리”라는 이미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2024년, 국제에너지기구(IEA)의 통계는 놀라웠다.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출하량의 절반 가까이가 LFP였고, 중국 내수 시장에서는 월간 기준 80% 이상이 LFP였다. 테슬라, 폭스바겐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도 LFP 채택을 늘리며 ‘대체재’가 아닌 ‘기본 옵션’으로 인정하였다.


이는 단순한 기술 진화가 아니다. CATL과 BYD가 구축한 대규모 생산 네트워크, ESS(에너지저장장치) 시장으로의 확산, 그리고 정부 보조금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즉, LFP는 “보급형 전기차 시대의 사실상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자리매김하였다.


② 한국의 고니켈 전략, 프리미엄의 덫에 갇히다

한국의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는 오랫동안 고니켈 전략에 집중해왔다. 에너지 밀도가 높고 장거리 주행이 가능하며, 고급차 시장에서 탁월한 경쟁력을 지녔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프리미엄’만으로 크지 않는다.


2025년 상반기, 한국 3사의 글로벌 점유율은 16.4%로 하락했다. 반면 CATL과 BYD는 가동률 90%로 ESS·대중형 EV 시장을 장악하였다. 한국은 절반 수준인 50% 내외에 머물렀다. 기술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지만, 문제는 “스펙”이 아니라 “스케일과 표준”이었다.


이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이론이 그대로 재현된 사례다. 고가·고성능 제품이 시장을 열지만, 결국 더 단순하고 저렴한 기술이 대중을 장악하며 산업의 중심을 이동시킨다. VHS가 그랬고, LFP가 지금 그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


③ 표준 경쟁의 본질: 생태계·전환속도·정책이 만든다

기술표준 경쟁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생태계의 크기다. 누가 더 많은 OEM·공급망·소프트웨어·인증체계를 끌어들이느냐가 승부를 가른다. 테슬라·폭스바겐이 LFP를 선택한 순간, LFP는 시장의 ‘기본값(default)’이 되었다.


둘째, 전환 속도와 학습곡선이다. 같은 기술이라도 얼마나 빠르고 쉽게 라인을 돌릴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누적 생산이 많을수록 단가가 떨어지고, 수율·납기도 개선된다. 결국, 대량생산이 표준을 강화한다.


셋째, 정책의 방향성이다. IRA(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 EU 현지화 규제, 중국의 보조금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정책이 기술을 표준으로 만든다”는 사례다. 정책의 바람은 기술보다 무겁다. 한국이 기술적으로 앞서더라도, 글로벌 규제와 공급망 재편이 LFP 중심으로 흘러가면 표준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


④ 차세대의 전장: ESS와 전고체 배터리

전기차 다음 전장은 ESS다. 여기서는 가격과 안전성이 절대적이다. 이미 LFP가 ESS 시장의 표준으로 굳어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잇따라 LFP ESS 전용 라인을 증설하는 이유다.


하지만 다음 싸움은 전고체, 소듐, LFMP 같은 차세대 배터리다. 전고체는 에너지 밀도와 안정성 모두를 잡을 수 있는 기술로 평가받고 있지만, 아직 생산비용과 공정 난이도가 높다. 누가 먼저 생태계와 인증 체계를 구축하느냐가 “다음 세대의 VHS”를 결정할 것이다.


기술보다 빠른 표준, 표준보다 빠른 전략

기술의 역사는 반복된다. VHS는 베타맥스를 이겼고, LTE는 WiMAX를 눌렀다. 그리고 지금, LFP는 고니켈을 압박하고 있다. 이 모든 사례가 말해주는 교훈은 하나다.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최고의 기술이 아니라, 시장이 받아들인 표준이다.”


한국의 배터리 산업은 여전히 기술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이제는 기술 스펙의 경쟁이 아니라, 표준의 게임을 이해해야 한다. ESS 시장으로의 피벗, LFP 내재화, 그리고 차세대 전고체 선점이라는 세 가지 축을 동시에 굴릴 필요가 있다.


앞으로 2~3년이 그 분기점이다. 한국이 이 시기를 놓친다면, 기술은 남지만 시장은 사라질 수 있다. 반대로, 기술표준 경쟁의 본질을 이해하고 생태계와 전환 속도, 정책 순풍을 묶어낼 수 있다면, 한국은 다시 한번 글로벌 배터리 패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승부는 “누가 기술을 잘 만드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빨리 시장의 표준을 만들어 내느냐”의 싸움이다. VHS에서 LFP까지 이어진 이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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