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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Sep 01. 2022

새 가족이 생겼다

동물에 관심이 과하게 생기는 5세.


둘째가 5세 후반에 들면서 드디어 동물에 관심이 생겼다. 그것도 동물목에서 80% 이상을 차지한다는 곤충에.


집에 새끼손가락 반 만한 집게벌레가 출몰했을 때 무서워서 도망치다 집에 있는 화분들을 몽땅 엎어 깨뜨린 전적이 있는 나는 곤충이나 곤충 비슷한 것들에 학을 뗐다. 내가 무서워하지 않는 유일한 곤충은 포도 벌레 정도.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둘째는 끊임없이 장수 풍뎅이니 사슴벌레니 애벌레의 실제 사진이 등장하는 책들을 가져와서 읽어달라고 했다. 곤충 관련 책을 읽어줄 때마다 팔에 소름이 찌릿찌릿 돋고 무섬증이 일어 곤욕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유심히 사슴벌레 유충과 성충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둘째가 무서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나 사슴벌레랑 같이 살고 싶어. 사슴벌레 우리 집에 데려와."


배우자의 직장이 산 가까이 있는지라 마음만 먹으면 사슴벌레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를 몇 달 전에 한 번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흘려들은 줄 알았더니만. 빨리 아빠 일하는 데 가서 사슴벌레 데려오자며 난리법석이었다. 하. 5세의 놀라운 기억력.

나는 내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때 알았다. 배우자에게 전화를 걸어 아직도 사슴벌레 있냐고 물어본 거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혼자 자취할 때 바퀴벌레 한 번 나왔다고 친구 집을 전전하며 거의 한 달 동안 자취방에 안(못) 들어간 그런 사람인데. 사슴벌레를 집에 들일 각오를 하다니. 이 궁극의 사랑 뭐야. 나를 철저히 희생해 가정을 평화롭게 했으니 노벨 평화상 감 아니냐고.


아무튼 그날 바로 사슴벌레 암컷이 락앤락에 담겨 집으로 왔다.


처음엔 껍질이 너무 반들반들하고 검어서 무섭고 다리에 털 같은 것도 나 있어서 그것도 무섭고 쳐다보는 것 자체가 그냥 다 무서웠는데 자식이 퍽 자주 들여다보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슴벌레 어떻게 됐나 살피며 애지중지하니 나도 조금씩 마음이 열렸다.

아니, 근데 자꾸 보니까 이놈이 귀여운 거다. 곤충 젤리를 넣어주면 제 딴엔 최고 속도로 허겁지겁 기어가 얼굴을 쿡 처박고 열심히 입을 놀리며 먹는다. 젤리 안으로 파고 들어가다 그만 젤리 무게에 푹 묻히기도 한다. 그러곤 태평스럽게 젤리에 들어박혀 잠을 잔다. 처음엔 젤리 속에서 안 나오고 얼굴을 처박고 있길래 숨 못 쉬어서 죽은 줄 알고 둘째가 울고 불고, 나도 우리 집에서 송장 치우게 생겼다며 야단법석을 피웠는데 첫째가 명쾌히 문제를 해결했다. 첫째 다니는 학교에 9살 곤충 박사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한테 바로 물어본 거다. 곤충 박사님 왈. '사슴벌레는 원래 그'.

11시간 넘게 젤리에 얼굴 처박고 있 사슴벌레를 계속 관찰한 결과, 갑자기 엉덩이를 쓰윽 들어 젤리 색 똥을 픽 싸더니 느릿느릿 흙을 파고 들어갔다. 우리의 야단법석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무심한 태도로.


사슴벌레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 동네를 뒤져 가장 큰 사이즈의 곤충 채집 통과 발효톱밥, 놀이목(사슴벌레가 뒤집어졌을 때 잡고 일어날 수 있는 지지대 역할)을 샀다. 도서관에 가서 사슴벌레에 대한 두꺼운 책도 빌려서 자식들과 샅샅이 읽었다. 발효톱밥을 물에 적셔 단단하게 눌러주고, 놀이목도 얼키설키 쌓아 주고, 유산균과 천연 나무 수액이 함유된 곤충 젤리까지 넣어주니 숲을 축소시켜놓은 듯한 풍경이 완성되었다.


새 집에 옮겨주니 깜짝 놀랐는지 주춤대다 이내 곤충 젤리 냄새를 맡고 엉금엉금 기어가 얼굴을 파묻는다. 동그랗고 반들반들한 등이 귀엽다. 느긋한 몸짓도 귀엽다. 하지만 사슴벌레 사육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열심히 돌봐주거나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닐까. 사슴벌레는 혼자서도 잘 놀고, 가끔 젤리 색 똥을 싸더라도 금방 치워줄 필요가 없고, 배변 훈련을 시키거나 때맞춰 산책을 나갈 필요도 없다. 흙을 파고 들어가서 푹 자다가 마음 내키면 나와서 젤리를 파먹는 아주 단순하고 자기 마음에 충실한 삶.


성충이 되고도 몇 년이나 산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벌써 정이 단단히 들어서, 장수풍뎅이처럼 6개월 만에 수명이 다하면(생각만 해도 눈물 나려고 한다, 크흡) 너무 슬플 것 같다. 애들이 뭘 키우더라도 결국은 내가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는데, 얘는 2주에 한 번 흙만 갈아주면 된다. 만세! 식물 키우기보다 쉽다!


반려동물을 키우게 되면 걔 신경 쓰느라 나의 혼자 있는 안온한 시간이 방해될까 걱정했는데 내 존재가 사슴벌레의 평화로운 삶에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사슴벌레가 내 삶을 침범하는 일은 없었다. 뭐하나 보고 싶어 불을 켜면 밝은 빛에 놀라 허둥지둥 흙을 파고 들어간다. 음. 역시 내가 얘한테 방해군. 흙에 파묻혀 아예 보이지 않게 된 사슴벌레를 다시 어두운 방에 놔주고 분무기로 물만 몇 번 뿌려준다. 습한 환경이 사슴벌레 관절에 좋다기에.


사슴벌레 암컷이 들어옴으로써 우리 집 여자 비율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유일한 수컷 1은 야근하느라 밤늦게 들어오니까 평소 우리 집은 암컷 밀집도가 아주 높은 셈이다. 암컷 사슴벌레는 수컷 사슴벌레처럼 영역에 민감하거나 호전적이지 않고, 밥 먹고 나면 바로 짝짓기를 하려 드는 수컷과는 달리 혼자 조용히 쉬는 걸 더 좋아한다고 한다. 호오. 흥미로운걸.


아무튼 갑자기 생긴 이 반려동물은 나에게 생각보다 더 사랑받고 있다. 첫째가 '슴돌이'라는 아주 직관적인 이름도 지어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함께할 수 있을진 알 수 없지만 나보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이 평화로운 곤충을 아주아주 아껴줄 예정이다. 다음엔 영양제 성분이 듬뿍 들어간 곤충 젤리를 주문해야지.


사슴벌레의 무심하고 여유로운 태도가 내 삶에도 묻어, 덕분에 며칠 마음이 잔잔했다.

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 고마워. 느긋한 사슴벌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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