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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Sep 13. 2022

네가 가진 무딘 적의

한 사람이 발산한 작은 악의들이 쌓이고 쌓여서 어,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나? 하는 깨달음이 마침내 생길 때가 있다.


무신경하게 있다가 나를 싫어하고 있는 줄 몰랐던 사람에게 가슴 아픈 일격을 당한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그들이 했던 말, 내가 했던 말을 복기해보며 타인의 호의나 악의를 감지해보려 애쓴다. 건강하지 않은 행동이란 걸 물론 알지만 내 마음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강해 늘 그런 짓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깨달음이 딱 올 때가 있다. 아. 그 사람 나를 싫어하고 있구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삐죽삐죽 새어 나와 날카로운 끝을 드러내고 그 사람이 베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운 좋게 상대를 베는 것을 피해 가는 날도 있지만, 예상치 않은 순간에 서로를 베이게 할 때도 있다.


얼마 전, 공통의 지인을 여럿 둔 한 사람의 칼날에 지속적으로 베이는 일이 생겼다. 무의식적인 적의.  가슴에 담아두었다 무심결에 나온 듯한 무딘 적의였다. 내 외모를 칭찬하는 듯하다 어느새 판단한다든지, 내가 한 발언을 꼬투리 잡아 '네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다'는 식으로 농담을 빙자한 비꼼을 행한다든지, 내가 옛날에 했던 말실수를 기억해 두었다가 여러 사람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 면박을 준다든지 했다. 이 정도면 그 사람이 얼마나 나를 미워하는지 알 법도 한데 며칠 전에서야 번뜩, 아, 걔가 날 싫어했던 거구나!! 하는 각성이 느지막이 찾아왔다. 박지선 교수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은 기만을 감지하는 능력이 아주 떨어지는 듯하다. 나에 대한 적의를 숨기려 상대방이 내게 줬던 선물들과 안부 전화, 나에게만 나눠주는 듯던 그의 비밀들이 내 눈을 가렸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내게 면박을 줬을 때도 에이, 농담이 심하군, 하고 애써 넘겼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해보긴 했지만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있어서다, 라는 결론까지는 가 닿지 못했다.

하지만 명절 동안 가족관계가 단절된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할 시간이 썩어 날 정도로 많았고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전반적으로 돌아보았으며 그 결과로 나에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조건적인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과 친밀한 우애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또 나를 미워하거나 적의를 갖고 있는 사람을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나에게 적의를 갖고 있는 듯한 한 사람은 그 과정에서 걸러내진 것이다.


연휴 끝물에 애 보기 지친 사람들이 연락이 와서 놀이터에서 다같이 만나기로 했는데 그 장소에 그 사람도 왔다. 이제는 그 사람이 나에게 갖고 있는 적의에 나름대로 안테나가 서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뱉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은 전이라면 내가 캐치하지 못했을 무딘 적의를 또 발산했고 나는 그것을 느꼈다. 대충 내 자식이 못생겼다는 내용이었다.

하.

상종 못할 사람.

이제는 네가 날 미워하고 있다는 걸 잘 알겠다.

내 마음을 더는 나누지 않을 것이다. 네 칼날에 내가 베이지 않도록. 하지만 겉으로는 웃으며, 내 칼날에 네가 베이지 않도록 나만의 적의를 잘 숨겨둘 것이다.

어른의 관계란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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