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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Sep 18. 2022

기계로부터 배운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하길

"기계는 의기소침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무료함이라는 감정을 모르며 주인을 위해 어떤 과업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신념이나 욕망도 없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소명을 다한다."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에 나오는 문장이다.

다른 글에도 이 문장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만큼 마음에 진하게 남았다.


나도 기계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소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식기세척기를 쓰지 않는 시간에 왜 너 일 안 하고 있어, 하고 질책하지 않는 것처럼. 세탁기를 돌리지 않을 때 왜 넌 그냥 공간만 차지하고 있어, 하고 화내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가 작동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쉬어도 되는 시간엔 아무 생각 없이 작동을 멈추고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하고 있지 않는 시간에 의기소침해하거나 초조해하거나 뭔가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욕망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자리를 바른 자세로 지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그런 거 아닐까. 존재 자체만으로도 만족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잔잔하며, 직선상의 시간 위에 점처럼 놓여 초라해지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것.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선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모든 방향으로 확장된 공간으로 파악하는 것. 나를 점이나 선으로 보지 않고 좀 더 입체적인, 다각의 무언가로 생각하는 것.


무엇보다 나 자체로 만족하는 것.

그런 자세가 나에게 필요하다.


잠잠히 집 귀퉁이를 지키는 기계에게서 그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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