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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Oct 17. 2022

아줌마와 힙함의 거리는 얼마

저세상 힙함을 바라며

오늘은 드디어 자가격리 해제일이다.

배우자 지난주 목요일 해제, 첫째 어제 해제, 둘째 오늘 자정 해제.

12일의 격리 기간을 견디고 몸과 마음이 아주 너덜너덜해졌다. 특히 오늘. 애가 6시 반에 일어났는데 내 앞에 덜렁 놓여있는 하루가 너무 길어 몸이 배배 꼬이고 단전이 답답했다. 아니. 왜. 아기는 사랑스럽고 귀엽고 말랑하고 이쁘고 다 좋은데 왜. 나는 아기와 둘만 있는 시간이 이다지도 괴로울까.

 

책을 스무 권도 넘게 꺼내 목이 잠기도록 읽어줬다.

싫다고 도리질 치는 애를 따라다니며 아침을 먹이고, 빌다시피 약도 먹였다.

그러고 나니 10시 30분.

31분.

한참 딴생각하다 다시 시계를 봤는데 10시 33분.

10시 33분이라는 숫자를 볼 때의 절망감이 지금도 선명하다.


오전 10시 33분.

아가와 나 단 둘.

아가는 끊임없이 혀 짧은 목소리로 '엄마! 나 책 읽어줘. 엄마! 나 간식 줘. 엄마! 나 그림 그린 거 봐. 엄마! 나 사진 찍어 줘'하고 귀여운 말들을 하지만 내 귀엔 '미야 나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말고 제대로 돌봐라'로만 들릴 뿐이다.

엄마. 엄마. 엄마. 1분에 열 번도 넘게 불리는 엄마라는 말.

무섭다. 그 말이. 너무너무.


얼마 전 결혼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슬슬 아기를 가져 볼 생각이라며, 아기 낳고 길러보니 어떻더냐고 물어왔다.


"야. 아기는 말이야. 네 인생은 이제 어느 정도 누릴 거 다 누려서, 아기에게 세대교체를 해 줄 용의가 충만할 때 낳아. 너 아닌 다른 존재에게 네 인생을 오롯이 집중하고 바칠 생각이 넘쳐흘러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 그럴 때 낳으라구. 새벽 2시, 4시, 6시에 깨서 젖 먹이느라 밤새 못 자고 귀 찢어져라 우는 소리를 들어도 아기를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 있을 거 같을 때! 그때가 아기 낳을 때야. 난 이제 내 인생이 없어져도 괜찮다, 내 인생을 내 자식에게 모조리 바쳐도 좋다 싶을 때, 그때! 그때 낳아."

악에 받쳐 내뱉은 내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친구는 아, 어, 응, 그 그래, 나는 그냥 남편이 아기 가져보는 게 어떻냐고 물어서, 생각만 해 본 거야, 좀 더 상의해봐야겠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아직 할 말 많이 남았었는데.


세상에 노 키즈존이란 곳이 졸라 많거든? 어떤 장소에 아기를 데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출입금지당하는 경우가 생길 거야.

큰맘 먹고 바깥나들이를 나가도 애 기저귀 갈 데 찾기 어려울 거고, 식당에서 애가 울기라도 하면 눈총도 받을 거야.

낮에 유아차 밀고 홈플러스나 백화점 돌아다니면 맘충 소리 들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 아. 카페 가서 네 돈으로 커피 시켜놓고 있어도 맘충 소리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인생은 아마, 다시 찾긴 어려울 거야.

애가 초등학교 입학하면 직장생활 유지하기 어려 거고. 프리랜서로 전향하든지 직장을 그만두던지 해야겠지. 높은 확률로 배우자보단 네가 그렇게 될 거야. 전업 주부가 되면, 월급은 안 나오는데 너는 애가 깼을 때 출근해서 애가 잠들기 직전까지, 혹은 잠들고 나서까지 퇴근이란 개념을 갖지 못할 거야. 그러면서도 집에서 노는 여자 취급을 받 수도 있어.

게다가 자식 성별에 따라 시가로부터 둘째에 대한 강한 압력을 첫째가 젖 떼기 전부터 받을 수도 있게 된단다.  

절망스러운 얘기만 하는 거 아니냐고?

태어난 애가 사랑스럽고 예쁘지 않냐고?


맞아.

사랑스러워. 내 삶을 통째로 바쳐도 아깝지 않을 때도 있을 만큼.

하지만 그렇게 애와 내 삶이 합체가 되면 서로 삶이 괴로워져.

그래서 난 아기를 내 방식대로 마음껏 사랑할 수도 없어.


꾸역꾸역 하루를 견디고 문득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윗옷에 애 먹일 갈비를 굽다 튄 간장 국물이 점점이 얼룩이 져 있다. 자세는 구부정하고 피부는 칙칙하다. 집에 있을 때 초라한 기분이 들기 싫어서 실내복으로 아무 옷이나 입지 않기로 결심했었는데. 어느새 구겨진 조거 팬츠에 목 늘어진 티셔츠 차림이 기본이 됐다.


갑자기 절박하게, 이런 문장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진짜....

힙해지고 싶다.


아무리 깨끗한 옷을 갈아입어도, 머리를 드라이하고 피부톤을 정리해도, 애 둘을 데리고 있는 이상 세상에서 말하는 '힙함'은 우주 저 멀-리,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버린다.

인스타에 자주 태그 되는, 인테리어가 아름답지만 노 키즈존이 아닌 정원 딸린 카페를 어렵사리 찾아가도 그곳에 있는 나는 힙하지 않다. 힙하게 차린 사람들이 배경으로 녹아든 곳에서 나는 이물질처럼 떠도는 존재다. 애들을 따라다니면서 새된 목소리로 음료 흘리지 마, 아이고 넘어졌네, 쉬 마렵다고? 응아? 물티슈가 어딨더라, 같은 말을 주어섬기며 똥 오줌 코딱지 등으로 점철된 나만의 배경으로 들어가 버린다.

 

애 엄마.

그리고 힙함.

서로, 으로 안 어울리는 단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너무나도. 힙해지고 싶다.

지코 새 노래로 틱톡에 챌린지 올려서 좋아요 만 개 받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콧물, 침, 오줌, 똥이 가장 중한 세계에서 벗어나 물티슈와 마이쮸가 들어있지 않은 작고 깨끗한 가방을 메고 다니고 싶다.


정말 저세상 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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