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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Oct 13. 2022

<제목을 입력하세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수많은 선택들을 하고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내 삶은 선택지와 그 선택지 사이에서의 갈등과 선택 후 후회로 가득 차 있다.


바닥을 닦을 것인가 말 것인가.

방금 갈아입힌 내복에 아이가 밥풀을 철철 흘리는데 단정히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혼자서라도 요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반납일이 거의 다 된 책을 (핸드폰을 내려놓고)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브런치에 뭐라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이 다섯 가지 고민을-때로는 열댓 가지 고민을- 한꺼번에 한다.


카페나 음식점에서 메뉴 고르는 건 나에게 특히 어려운 일이다. 일단 메뉴판을 시간을 들여 정독해야 한다. 십 수 가지 있는 메뉴 중 마음에 드는 선택지를 서너 가지로 좁히고, 그 안에서 골을 싸매고 고민한다. 뒤에 누가 줄이라도 서기 시작하면 진땀까지 난다. 친구들은 때로 나에게 점심 메뉴를 전적으로 고르게 함으로써 나를 고문한다. 내가 결정을 못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즐거워하곤 한다.


몇 년 전, 그룹 심리검사를 받았는데 수많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한꺼번에 한다는 해설지를 받았다. 마음이 늘 정돈되지 고 혼란한 상태인 거다. 성인 ADHD가 아닐까 많이 고민했었는데 이번 심리상담받으면서 한 테스트에 따르면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냥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 거다. 선택을 한 후 그 결과를 책임지고 자꾸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충분히 굳세지 못한 거다.


나는 교회를 다닌다. 최근 마음에 괴로운 일이 있어 성경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적으로 상당히 무리를 해서 성경공부반에 들어갔다. 성경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이어지는 계보, 유대인의 남성 우월주의, 고대와 중세의 철저한 가부장적 사고가 반영된 성경을 혼자서 읽어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시대를 넘어서 성경에 숨겨진 예수님의 진짜 마음을 알아내 보려고 성경공부를 시작한 거다.

그런데 성경을 알아갈수록 마음은 더 고민과 갈등에 빠진다.

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예를 들면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행동을 내가 하고 있고, 멈출 생각이 없을 때-에 대해 성경을 읽을수록 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음주. 흡연. 쌍욕 함부로 내뱉는 것.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내가 끊어낸 것들이다.

하지만 요즘은 철저하게 끊어내기로 마음먹었던 것을 칼같이 지키지 않는다. 때로 쏘맥을 취하도록 마시고 정신줄을 놓기도 한다. 술을 마시면 특히 욕을 많이 쓴다. 흡연에 대한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이 모든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때도, 욕을 하지 않을 때도, 담배를 피우지 않을 때도 죄책감을 느낀다. 강한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이래도 되나. 이런 것에 욕망을 이렇게 가져도 되나.


작용 반작용처럼, 평소에 지나치게 바르게 살려고 애썼던 부분이 술을 마시게 되면 억눌려 있던 부분이 통제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튀어나온다.


나는 그런 게 안된다. 오늘 엉망으로 살았어도 내일 다시 잘하면 되지, 이런 마음먹는 게 안 된다. 오늘 뭔가 망했으면 난 망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바로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


너무 유연하면 흐려져버리고, 너무 굳으면 부러져버린다는 생각을 오늘 했다.

유연해지고 융통성을 가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했던-하는-할 나를 이해해주고 감싸주고 보듬어 주는 것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다. 나를 힐난하는 일. 나에게로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일. 그게 가장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삶을 살아가며 생겨나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한다.



브런치 글쓰기 메뉴를 누르면 나오는 <제목을 입력하세요> 란에 무엇을 써넣어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며 여러 선택지 중 차악을 골랐다. 그리고.

이내 후회한다.


오늘도 이렇게.

겨우.

아무것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하루의 불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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