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씨 Jun 26. 2022

오늘 당신의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그림이 주는 특별한 기회를 생각하며

한참 쓰던 내용이 컴퓨터 조작 실수로 인해 다 날아갔습니다. 김영하 작가가 어디선가 나온 프로그램에서 '글 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백업이다. 항상 백업을 해라. 백업을 안 하고 작업물을 날렸다가 직업이 바뀔 수도 있다.'라고 대답하는 내용을 웃으며 봤었는데, 지금은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던 걸 후회합니다.


올해 나름대로 세운 올해 목표

 ‘읽은 책은 서평을 쓰기’였습니다. ‘꼭 쓰기’가 아니라 ‘쓰기’라고 세웠습니다. 부담이 가면 안 하게 될까 봐, 쉬엄쉬엄 내용을 정리하는 정도로 써 보기로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새해가 싫다. 새해가 오면 무언가 새롭게 계획을 세우고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할 것 같아서 싫다’라고 우는 소리를 했었는데, 그래서 제가 아무 계획도 안 세웠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문득 내 마음에 이 작은 목표를 이미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앞에 앉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애 둘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몰래 방을 빠져나와 화장실도 갔다가, 핸드폰도 만졌다가, 아기 사진첩도 봤다가, 잠시 딴생각도 했다가 겨우 노트북을 켜고 쓰고 싶은 글을 절반 이상 썼는데, 창이 훅 꺼지고 내용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장점을 이런 데서 발견하곤 합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생겼을 때, 괴로워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얼른 새로운 한글 창을 켜 ‘저장하기’를 끊임없이 누르면서 바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공지영 작가도, 위기철 작가도 글쓰기가 너무 괴로워서 컴퓨터에 저장된 ‘지뢰 찾기’ 같은 게임을 의미 없이 2시간 넘게 하다가 겨우 겨우 글쓰기를 시작하곤 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글도, 그림도 이 세상에 원래 없던 것을 나 스스로 창조하는 과정이기에 괴롭고, 누구도 나에게 열심히 하라고 등 떠밀어 주지 않기에 때로 외롭고 고독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화가들의 삶이 괴로웠던 이유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나 혼자 시작하고 나 혼자 마쳐야 하는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할 작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며 한 작품을 완성해도, 세상에서 받는 평가가 비난뿐이라면 어떻게 계속하여 자기 자신을 화가로서 살게 만들 수 있을지 답이 없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민 가운데 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고민의 깊이를 떠올려보며 이소영 작가의 <그림은 위로다>를 읽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은 <꽃피는 아몬드 나무>였습니다. 고흐, 비운의 화가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의 삶을 다시금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떻게 이 정도로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습니다.

고흐와 테오의 편지를 모은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둘 사이의 신뢰와 깊은 사랑이 편지에 절절하게 묻어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끊임없이 불안하고 소용돌이쳤던 내면 가운데서 테오는 고흐에게 멀리서 반짝이는 오롯한 빛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 테오를 위해, 자신의 새로 태어난 조카를 위해 그림을 그릴 때 고흐의 마음은 참으로 오랜만에 잔잔한 바다 같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물감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는 그림을 망칠 각오를 하지 않고는 붓질 한번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정할 때는 작은 붓으로 냉정하고 침착하게 해야 해.”라고 편지에 쓴  고흐의 말은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파멸에 가까운 상황에서 어떻게 '냉정'과 '침착'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85쪽에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결함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우리의 위대한 창조적 능력은 동반 관계에 있다. 역경을 부정하고 피하고 숨기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그 안에 감춰진 기회를 찾는 데 공을 들여라(에이미 멀린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잠을 자지 않고 가장 열심히 글을 쓰고 가장 열심히 책을 읽었던 시기는 아기를 갓 낳고 '아줌마'와 '경력단절녀'라는 꼬리표를 동시에 붙였을 때입니다. 그때 그렇게 맹렬하게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이유는 내가 생각해왔던 나 자신이 사라질 것 같아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없는 나, 더 이상 날씬하지도 않고, 깨끗한 옷을 입지도 않고 가슴에서 젖이 뚝뚝 떨어지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서, 미치도록 절박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로 아기 낳고 난 이후 달라진 삶과 내면의 불안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칭얼대는 백일도 안된 아기를 바운서에 눕혀 건성으로 얼러 가며 사납고 거세게 글을 썼습니다. 내가 생각했을 때 결함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내 안의 창조 능력에 불을 지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이제는 듭니다. 오히려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고부터는 제 안의 맹렬함도 함께 사라져 빈둥빈둥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때때로 일부러 자신을 우울증과 불안증 안에 던져둘 때가 있다’는 한 화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불안하고 우울하고 고독할 때 오히려 작품에 더 매달리게 되고, 그 결과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미 멀린스의 말은 얼마나 옳은지요. 또 그런 말을 남기기까지 에이미 멀린스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지요. 모든 창작자들이 겪는 고통이 결함과 창작 능력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150쪽에서 ‘목숨을 건 내 사랑들은 다 어디로 갔나’를 읽으며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나는 마리안네 같은 불같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라고 답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갉아먹으며 그 사람을 나 자신보다 더 우위에 두어 나 자신을 놓아버렸던 그런 사랑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은 저 자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비극적 분위기>를 보며 저의 과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작품은 암울한 색감이지만, 그림 안의 여인은 어찌 되었든 뒤에 사랑했던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 떠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그 이상한 헌신을 바쳤던 사랑에서 빠져나온 것에 이제는 감사합니다. 암울하고 비극적인 가운데서도 결국엔 제 자신을 끄집어내어 그 사랑을 뒤로하고 떠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5쪽에서 추사 김정희의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라는 글을 읽으며 또 저를 돌아봅니다. 빨리 남에게 인정받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 준비가 안 된 글을 공모전에 낸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번번이 탈락이었습니다. 겨우 몇 번의 실패에 좌절하고 자존심이 상해 ‘글을 꼭 써야 하나. 나는 작가가 될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해 그 이후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글을 안 쓸 좋은 핑계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글을 안 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다시 제 인생의 돌파구로 공무원 시험 준비가 아닌 글쓰기를 선택하고야 말았습니다. 잭 런던이 말한 것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기에, 몽둥이를 들고 찾아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강익중 작가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시험 없어도 공부하는 학생, 전시 없어도 그림 그리는 작가. 그들이 진짜 학생이고 진짜 작가”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출판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공모전에도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글을 계속 쓴다면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저 자신만이라도 아는 떳떳한 부분이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236쪽의 그웬 존의 <자화상>도 좋았습니다. 웃지 않는 여인의 모습이 묘사된 그림을 볼 때 느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많은 부분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을 강요당할 때가 많으니까요. 로댕의 삶에 휘말려 자신의 삶을 잃고 말았으나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져버리지 않고 그림을 그린 그녀의 애씀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가 결함을 가진 여성이다 보니 여성의 삶과 여성의 얼굴에 대해 자꾸 눈길이 더 갑니다. 그녀가 로댕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 내용을 읽었을 때, 일생일대의 사랑에서 응답받지 못한 절망감이 얼마나 심했을까 헤아리게 됩니다. 제 수많은 응답받지 못했던 사랑들을 생각해보면 그때마다 얼마나 우울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쳤었던지, 또 얼마나 나 자신을 자책하고 미워하게 되었던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림을 보는, 혹은 책을 읽는 이유는 디팩 초프라의 말처럼 ‘멈춰 서서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림을 보며 많은 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일어나 앞을 향해 나아갈 힘 또한 얻었습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책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나 혼자 낼 수 없는 에너지를 넘치게 얻었기 때문입니다.



책에 대해서 쓰면 제 내밀한 이야기들을 자꾸 내밀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제 곁에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게 됩니다. 많은 이해를 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불안을 잠시 한 켠에 밀어 놓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