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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ul 09. 2022

미간 주름이 사라진 시간

나는 지금 웃고 있다

나는 지금 웃고 있다.

비열한 웃음에 가까운 것을 입가에 띠고 있다.


오늘은 토요일인데, 3주째 배우자는 일하러 갔고 나만 또 독박 육아 당첨이었다.


주말 육아는 길고 지리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학교나 유치원을 가지 않는 어린이들과 하루 종일 원색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견뎌야 한다.


아침밥을 또, 차려야 하는데, 덥고 습해서 정말 불 앞에 서기 싫었다. 그래서 첫째는 시리얼 우유에 말아 주고 둘째는 구운 식빵에 버터 대충 발라 주었다. 우리 집 애들은 아침부터 꼭 밥에 국에 반찬 차려줘야 먹는 스타일이다. 시리얼이나 빵 같은 간편식 무지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그냥, 내가 편하고 싶어서 대충 차렸다. 자식들의 불평불만을 견디기로 결심하고 주는 아침 밥상.


아침 먹마자 애들은 안방에서 이불이며 보자기며 베개를 마구 끌고 나와 거실에서 캠핑 흉내를 낸다. 참자. 지금 잠시라도 엉덩이 붙이고 앉아 쉬려면 저 꼴을 참아야 한다. 나중에 한꺼번에 치우면 된다. 참자.

우유가 흐르고 시리얼 가루 빵가루 굴러다니는 식탁에 그냥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보지 말자. 안 봐야 마음 편하다.

책, 색종이, 가위, 풀까지 나와 뒹굴며 황폐화된 거실을 그냥, 뒀다. 멸망해가는 왕국을 바라보듯이 그냥. 치우라고 입 대기 시작하면 서로를 미워하게 될 뿐이니까.


그러던 중 배우자가 많이 힘들면 잠시 일터에 놀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애들 옷만 갈아입혀서 폭탄 떨어진 것 같은 거실을 뒤로하고 나갔다. 배우자 일터에서 한 시간 정도 뛰어놀게 하고 나니 애들 태권도장 단톡방에 카톡이 쌓여있다. 뭐지.


"오늘 태권도장에서 에어바운스 놀이를 합니다. 놀러 오세요~^^"


와아아아아아아 태권도 관장님 만세. 내 인생을 살리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관장님. 당장에 애들 간식, 관장님 음료수 사서 도장으로 갔다. 에어 바운스가 설치된 도장을 보고 애들은 웃었다. 나도 웃었다. 내가 웃고 있다!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애들하고 있을 때는 미간 주름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었다.


애들을 태권도장에 두고 집에 혼자 걸어오는데 주차된 차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웃음이 걸려 있다. 비열한 웃음이었다. 세상에서 애들을 제일 사랑한다면서, 애들이랑 있을 때는 한 번도 웃지 않다니. 비겁하군.

하지만 찌는 듯한 여름, 주말, 영유아를 혼자 돌봐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졸렬함도, 졸렬함에서 비롯된 내 웃음도 이해하겠지.


애들이랑 있을 때는 왜 웃음이 안 나는가.


혼자 화장실 한 번 못 가니까. 내가 읽고 싶은 책은 한 줄도 못 읽으니까. 설거지 한 번 맘 편히 못 하니까. 끊임없이 소음-자매끼리 개싸움-이 발생하니까. 집이 난장판이 되니까. 이런 이유들이 1차고, 2차는 책임감이 너무 무거워서인 것 같았다. 애들을 더 재밌게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남들은 물놀이도 시켜준다는데 나는 맨날 집 아니면 도서관이나 가고... 너무 한정된 경험만 시키는 거 아닌가? 건강밥상을 차려줘야 하는데 감자나 볶아서 한 끼 때워버리니 엄마로서 자격 미달 아닌가? 이런 내적 갈등이 홀로 하는 육아시간을 메웠다. 그러니 웃음이 안 나지.


아무튼 지금은 웃고 있다. 비열한 웃음이든 비겁한 웃음이든 어쨌든 웃고 있다. 아침 점심 다 안 먹었는데 배도 안 고프다. 불안한 마음도 싹 가셨다. 요기까지 글 쓰고 나면 마음 편~히 햇볕 쨍쨍 잘 드는 데에 천~천~히 빨래 널고 어쿠스틱 라이프 13권 읽을 거다. 혼자 있는 시간 만세, 만세,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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