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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ul 12. 2022

미안, 너랑 같이 살진 못할 것 같아

안전 이별을 바라는 요즘

소소하게 베란다 텃밭을 운영하는 요즘.

잘 자라던 아이들에게 수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초는 잘 자라던 강낭콩 잎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줄기가 말라비틀어지며 죽는 것에서부터였다.

이상하다. 과습도 아닌데. 바람도 햇빛도 잘 쐬어 줬는데. 너무 더워서 그런가?

수확하는 재미를 한창 느끼고 있었는데 일주일 새 덜 익은 콩알 두 개만 남기고 강낭콩은 강낭콩 별로 떠났다.

그다음 변화는 스티로폼 상자에 키우던 상추랑 케일에게 일어났다. 파릇파릇하던 이파리 색이 허옇게 변했다. 햇빛 드는 방향으로 쑥쑥 흙을 밀고 자라나던 애들이었는데 갑자기 성장이 딱 멈췄다. 계속 흙이 마르질 않았다. 뿌리가 물을 전혀 빨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금전수 화분도 새 잎을 전혀 내지 않고 목숨을 간신히 보전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육감이 계속 신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가드닝 초보는 그냥 날이 더워서 그런가 보네, 하고 넘겼다. 이 무심함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우리 집엔 음식물쓰레기가 전혀 없다. 음식물 찌꺼기가 조금만 생겨도 미생물 음식물 처리기에 바로 넣어버린다. 날 더워지고 나서는 아예 상온에 음식을 두질 않는다. 그런데도 초파리 같은 날벌레가 끊임없이 집안을 날아다녔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제대로 안 씻고 쓰레기통에 버려서 그런가 싶어서 싹싹 씻어 다 갖다 버리고 쓰레기통도 헹궜다. 그런데도 이놈의 새카만 날벌레가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늘어나는 거였다. 애들이 간식을 먹고 아무 데나 버렸나? 배수구가 문젠가? 구석구석 걸레질도 해보고 배수구 세척도 해봤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니 대체 뭐가 문젠거야.


가드닝을 제대로 해본 사람은 한두 마리 날벌레가 생겨났을 때부터 화분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화분이나 모종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꽃집에서 분갈이 깨끗이 한 화분만 선물 받아서 키워봤기에 병충해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집안을 휘휘 돌아다니는 날벌레를 때려잡는데만 신경을 썼다. 애들도 날벌레 잡기 고수가 돼서 엄마, 또 잡았어, 하고 자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왔다.


어제 빨래하러 나온 김에 식물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화분 흙에서, 예의 그 날벌레가 몇 마리나 날아오르는 거다. 얘가 왜 여기서 나오지? 하다가 갑자기 <크레이지 가드너>의 한 장면이 스쳤다.

이게 뿌리파리인가?

내가 너무 좋아하는 마일로 작가님의 본격 가드닝 만화 <크레이지 가드너>에서, 뿌리 파리 창궐 때문에 농사까지 접게 되신 분 이야기가 나왔던 게 그제야 생각났다.

뿌리파리는 젖은 흙에 알을 깐다. 알에서 깨어난 유충은 흙 속에서 식물 뿌리를 갉아먹으며 자라난 뒤 성충이 되면 흙 밖으로 나온다. 성충이 되어 밖으로 나오기 전까진 뿌리파리의 존재를 잘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성충이 된 뿌리파리가 온 집안을 날아다니고 화분마다 알을 까고 나서야 피해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제일 피해가 심해 보이는 쌈배추 모종 쪽 흙을 파 들춰보니 허연 알과 벌레가 우수수 딸려 나왔다. 수백 개의 알들이 배추 뿌리에 조롱조롱 달린 모습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아악! 미안하다. 진짜 너랑은 같이 못 살겠다.

모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미친 듯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뚫고 종묘사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사장님, 뿌리파리 때문에 미치겠어요. 농약 좀 살 수 있을까요."

"아, 저희는 한 말 단위로만 파는데... 농사짓는 면적이 얼마나 되세요?"

이럴 때 내가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시골에 산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애초에 집 근처에 종묘사가 여러 군데 있다는 거 자체가 시골임을 방증한다). 수십 가지 모종이 좌악 전시된 종묘사에서, 플라스틱 상자에 모종 몇 개 키운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워서 말이 입 밖으로 잘 안 나왔다.

"음... 저...(한참 머뭇머뭇) 그냥 플라스틱 상자에 키우는데... 뿌리파리가 기승이라.... 최대한 작은 걸로 주세요."

사장님은 한동안 고민하시더니 뿌리파리 특효로 나왔다는 신상 농약 10ml를 주셨다. 진짜 작은 병이었는데 20리터 물에 희석시켜 써야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쓰지 말란다. 어지간히 독한가 보다.

집에 오자마자 2리터 페트병에 한 방울 섞어서 모종마다 콸콸 뿌렸다. 소독약 냄새가 온 베란다에 진동했다. 애들이 못 들어가게 베란다를 봉쇄해놓고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여전히 뿌리파리 몇 마리가 빌빌대며 날아다니고 있다. 성충은 손으로 때려잡는 수밖에.

진짜 '상추 키우기 체험'수준으로 모종 몇 개 키울 뿐인데. 10년 넘게 집 근처에 있었지만 문 손잡이 한 번 만져본 적 없었던 종묘사의 사장님과 대화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도 농약을 쳐야 채소가 자란다는 어른들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몸소 깨달았다.


그래도 농약을 물에 타서 뿌리고 나니 진짜 가드너가 된 기분이다. 지금까진 입덕 부정기 같은 시기였다. 바질이며 케일 씨앗을 심은 플라스틱 상자가 하나 둘 늘어나고 싹 틔운 봉선화를 큰 화분에 줄지어 심으면서도 난 가드너 같은 건 아니야, 상추 정도는 어느 집이나 대충 키우는 거니까-하고 생각했다. 누가 '집에 채소 같은 거 키우나요?'하고 물어도 그냥 입 다물고 은은한 미소만 지었다. 플라스틱 박스 가드닝 정도로 채소를 키운답시고 나대는 게 당치 않은 것 같아서.

 아, 그런데 이제는 좀 나대도 될 것 같다.

종묘사에서 농약까지 사서 뿌려본 사람이니까.

그래서 오늘 친구들이랑 하는 영어 스터디 시간에 'agricultural chemicals(농약)'란 단어를 외워 가서 뿌리파리를 죽여버리려고 애쓴 공로를 자랑 또 자랑했다.


 참.

'지구에서 인간 아닌 생명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를 삶 깊이 새겨보려고 채소를 키우기 시작했건만.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뿌리파리, 너랑은 정말 같이 못 살겠다.  



지금도 눈앞 몸통이 새카만 것들이 몇 놈이나 날아다니고 있다. 모레 농약 한 번 더 치고 나면 그래도 좀 줄겠지.


뿌리파리와 이 정도 인연으로 안전 이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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