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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un 25. 2022

불안을 잠시 한 켠에 밀어 놓는 법

엄마 구실 말고 내 구실을 하자

 통통한 손가락이 옆구리를 마구 찔러온다. 주말인데 대체 왜. 학교 때는 일곱 시 반까지 쿨쿨 자던 애가 여섯 시부터 깨서 엄마 엄마 부르며 괴롭힌다. 서슬에 결국 동생도 깼다. 토요일 아침 6시부터 우리는 전쟁이다. 아니, 나만 전쟁이다. 베개 끌어안고 자고 싶다.  일으켜 세우려는 첫째 둘째의 공세에도 안 일어나고 엎드려 생각한다. 이 세상에 아직 아기 낳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은 없을까. 주말 아침 6시에 일어나도 짜증 하나도 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애는 낳지 말아요. 전 세계로 텔레파시라도 보내야 한다. 무자녀 이성애 커플들이 알아야 돼. 새벽에 일어나서 다른 사람 오줌 닦아주고 읽어주고 차리고 치우는 귀찮아하지 않고 사랑으로 있는 사람만 낳아야 한다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둘째는 계속 책 읽어줘, 책 읽어줘 하면서 내가 무서워하는 신기한 스쿨버스 책을 들고 왔다(글밥이 많고 내용이 길어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이 안나는 책).


아아.

어쩔 수 없이 또 강제 성실인이 되어야 하는 건가.


결국 억지로 몸을 일으켜 (엄마!! 안아!! 안고 거실로 가자!!) 책을 읽고(재미있는 목소리로 읽어!) 어제 안 개고 한편에 쌓아둔 빨래를 개서 정리하고(엄마!! 집안일하지 말고 나랑 레고 해!) 사과를 깎고(나 사과 숟가락으로 긁어서 먹여줘!) 밥을 차려(우웩, 이 반찬 먹기 싫어!) 먹였다.


배우자는 이틀째 출장 중. 묵고 있는 호텔 조식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망고랑 훈제연어랑 오믈렛이 담긴 하얀 접시 사진.

김가루와 밥풀과 계란 껍데기가 굴러다니는 우리 집 식탁과 사진을 번갈아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왠지 지는 느낌이 들어서 통통 말랑한 애기 볼 깨물어 먹는 사진을 답신으로 보냈다. 넌 망고를 먹겠지만 난 애기 볼 먹고 있다.


동향인 우리 집은 아침부터 쨍한 햇살이 쏟아져 후끈후끈하다. 더운 날이 되려나보다. 오늘은 뭘 하며 애들과 놀아줘야 하나. 너무 더우면 놀이터 가기도 힘든데. 신혼 장거리 출퇴근하다 차가 완파되는 사고를 번이나 겪은 나로서는 혼자 운전해서 데리고 장거리 놀러 가는 건 부담스럽다. 그럼 결국 시골서 갈 데라곤 두 군데뿐이다. 도서관과 홈플러스. 애와 엄마에게 안전하고 친절한 공간은 아동도서관과 홈플러스밖에 없구나. 주말 일정이 맨날 똑같아서 애들한테 미안하다. 그래도 만화책 실컷 읽게 해 주면 첫째 놈은 좋아하겠지.


아직도 7시다.


죙일 혼자 애들 돌볼 생각하니 또 심장이 세차게 뛴다. 애들이랑 있으면 계획대로 착착 되는 일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데도, 일정과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절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통제 본능이 고개를 든다. 얼른 항불안제 한 봉 찢어 입에 털어 넣었다.


도서관은 9시나 돼서 문을 여니까 큰 스케치북 펼쳐서 같이 티니핑을 그렸다가(요즘 둘째 최애다), 종이접기 책 펼쳐서 펭귄을 접어 줬다가, 평소에 잘 안 주는 얼린 초코도 줬다가 하며 시간을 견뎠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땐 시간을 잘 견디는 게 중요하다. 화내지 않고, 신경질 내지 않고 시간을 잘 견디는 착한 어른에게는 마법 선물이 주어진답니다. 아기가 저녁 8시도 되기 전에 눈을 비비면서 졸려요, 하더니 혼자 엎드려 잠들어주는, 그런 놀라운 선물을 받은 착한 어른도 있대요.

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지만.


셋이서 거실을 색종이 조각과 스티커와 그림책으로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 갑자기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났다. 어우 깜짝이야.

친정 엄마가 서 있었다.

감자 캐러 가는데 애들을 데려가 준단다. 너는 집에서 쉬란다. 아침밥도 먹이고 데려다준단다.

대박 나 오늘 착한 어른이었나 봐.

엄마한테 감사 백번 하고 애들 몸에 모기기피제랑 선크림을 떡칠한 후 우르르 내보냈다. 하. 이 공기 뭐야. 왜 이렇게 시원해. 상쾌하다 상쾌해.

애들 나가자마자 초코맛 그래놀라(애들 있을 땐 자꾸 나눠달라 해서 못 먹는) 한 사발 우유에 말아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애들하고 같이 있을 땐 마음 한 구석에서 딱딱한 돌처럼 덜그럭거리며 돌아다니던 불안이 어딘가로 사라진 걸 느꼈다.

음. 그래.

역시 사람은 엄마 구실만 하면서 살아갈 순 없구나.

내 구실을 하고 살아야 숨통이 트이는구나.

내가 하고 싶은 것, 지금 나한테 재밌는 것을 할 시간이 있어야 사는 게 맛있게 느껴지는구나.


난다 작가님 책에서 읽었던가. 애하고 있을 땐, 게임으로 치면 내가 만렙 유저인데도 불구하고 레벨. 1 단계에서 쓸데없는 돌만 깨고 있는 기분이라고.

아기는 사랑스럽고 목숨보다 귀하지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더럽히고 말 안 듣고 도망 다닌다. 아이와 있는 내내 엄마 구실 똑바로 하기가 쉽지 않다. 주스 한 통 와르륵 쏟아서 옷이며 의자며 다 적셔놓고 엎드려 그거 닦고 있는 엄마 등에 올라타 히히힝~말아 달려 히히힝~하면 이성의 끈이 끊어질락 말락 한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매 순간 벌어져서 통제광인 나는 늘상 불안하다. 뭔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애들에게 내가 소리 지르고 화내고 밑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이 닥치게 될까 봐 초조하고 겁이 난다.

그런데 지들이 좋아하는 할머니 따라 애들이 나가 주니 잠시간은 엄마 구실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글 쓰면서 내 구실 하니 얼마나 마음 편하고 좋은지.


9시 10분. 감자 캐서 시커메진 손으로 애들이 곧 들이닥칠 거다. 그전까지 쓰고 싶은 거 실컷 쓰고 방탕한 시간을 보내야지. 아침 설거지 따위엔 손끝 하나 안 댈 거다.

이렇게 내 구실 좀 하고 나면 다시 엄마 구실 할 수 있는 새 힘이 돋아나겠지.

들어오는 애들한테 오늘은 짜증 안 내고 친절하게 대해야지,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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