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잠시 한 켠에 밀어 놓는 법
엄마 구실 말고 내 구실을 하자
통통한 손가락이 옆구리를 마구 찔러온다. 주말인데 대체 왜. 학교 갈 때는 일곱 시 반까지 쿨쿨 자던 애가 여섯 시부터 깨서 엄마 엄마 부르며 괴롭힌다. 그 서슬에 결국 동생도 깼다. 토요일 아침 6시부터 우리는 전쟁이다. 아니, 나만 전쟁이다. 베개 끌어안고 더 자고 싶다. 나를 일으켜 세우려는 첫째 둘째의 공세에도 안 일어나고 엎드려 생각한다. 이 세상에 아직 아기 안 낳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은 없을까. 주말 아침 6시에 일어나도 짜증 하나도 안 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애는 낳지 말아요. 전 세계로 텔레파시라도 보내야 한다. 무자녀 이성애 커플들이 알아야 돼. 새벽에 일어나서 다른 사람 오줌 닦아주고 책 읽어주고 밥 차리고 치우는 거 귀찮아하지 않고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사람만 애 낳아야 한다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둘째는 계속 책 읽어줘, 책 읽어줘 하면서 내가 무서워하는 신기한 스쿨버스 책을 들고 왔다(글밥이 많고 내용이 길어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이 안나는 책).
아아.
어쩔 수 없이 또 강제 성실인이 되어야 하는 건가.
결국 억지로 몸을 일으켜 (엄마!! 안아!! 안고 거실로 가자!!) 책을 읽고(재미있는 목소리로 읽어!) 어제 안 개고 한편에 쌓아둔 빨래를 개서 정리하고(엄마!! 집안일하지 말고 나랑 레고 해!) 사과를 깎고(나 사과 숟가락으로 긁어서 먹여줘!) 밥을 차려(우웩, 이 반찬 먹기 싫어!) 먹였다.
배우자는 이틀째 출장 중. 묵고 있는 호텔 조식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망고랑 훈제연어랑 오믈렛이 담긴 하얀 접시 사진.
김가루와 밥풀과 계란 껍데기가 굴러다니는 우리 집 식탁과 사진을 번갈아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왠지 지는 느낌이 들어서 통통 말랑한 애기 볼 깨물어 먹는 사진을 답신으로 보냈다. 넌 망고를 먹겠지만 난 애기 볼 먹고 있다.
동향인 우리 집은 아침부터 쨍한 햇살이 쏟아져 후끈후끈하다. 더운 날이 되려나보다. 오늘은 뭘 하며 애들과 놀아줘야 하나. 너무 더우면 놀이터 가기도 힘든데. 신혼 때 장거리 출퇴근하다 차가 완파되는 사고를 두 번이나 겪은 나로서는 혼자 운전해서 애 둘 데리고 장거리 놀러 가는 건 부담스럽다. 그럼 결국 시골서 갈 데라곤 두 군데뿐이다. 도서관과 홈플러스. 애와 엄마에게 안전하고 친절한 공간은 아동도서관과 홈플러스밖에 없구나. 주말 일정이 맨날 똑같아서 애들한테 미안하다. 그래도 만화책 실컷 읽게 해 주면 첫째 놈은 좋아하겠지.
아직도 7시다.
죙일 혼자 애들 돌볼 생각하니 또 심장이 세차게 뛴다. 애들이랑 있으면 계획대로 착착 되는 일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데도, 일정과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절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통제 본능이 고개를 든다. 얼른 항불안제 한 봉 찢어 입에 털어 넣었다.
도서관은 9시나 돼서 문을 여니까 큰 스케치북 펼쳐서 같이 티니핑을 그렸다가(요즘 둘째 최애다), 종이접기 책 펼쳐서 펭귄을 접어 줬다가, 평소에 잘 안 주는 얼린 초코도 줬다가 하며 시간을 견뎠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땐 시간을 잘 견디는 게 중요하다. 화내지 않고, 신경질 내지 않고 시간을 잘 견디는 착한 어른에게는 마법 선물이 주어진답니다. 아기가 저녁 8시도 되기 전에 눈을 비비면서 졸려요, 하더니 혼자 엎드려 잠들어주는, 그런 놀라운 선물을 받은 착한 어른도 있대요.
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지만.
셋이서 거실을 색종이 조각과 스티커와 그림책으로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 갑자기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났다. 어우 깜짝이야.
친정 엄마가 서 있었다.
감자 캐러 가는데 애들을 데려가 준단다. 너는 집에서 쉬란다. 아침밥도 먹이고 데려다준단다.
대박 나 오늘 착한 어른이었나 봐.
엄마한테 감사 백번 하고 애들 몸에 모기기피제랑 선크림을 떡칠한 후 우르르 내보냈다. 하. 이 공기 뭐야. 왜 이렇게 시원해. 상쾌하다 상쾌해.
애들 나가자마자 초코맛 그래놀라(애들 있을 땐 자꾸 나눠달라 해서 못 먹는) 한 사발 우유에 말아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애들하고 같이 있을 땐 마음 한 구석에서 딱딱한 돌처럼 덜그럭거리며 돌아다니던 불안이 어딘가로 사라진 걸 느꼈다.
음. 그래.
역시 사람은 엄마 구실만 하면서 살아갈 순 없구나.
내 구실을 하고 살아야 숨통이 트이는구나.
내가 하고 싶은 것, 지금 나한테 재밌는 것을 할 시간이 있어야 사는 게 맛있게 느껴지는구나.
난다 작가님 책에서 읽었던가. 애하고 있을 땐, 게임으로 치면 내가 만렙 유저인데도 불구하고 레벨. 1 단계에서 쓸데없는 돌만 깨고 있는 기분이라고.
아기는 사랑스럽고 목숨보다 귀하지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더럽히고 말 안 듣고 도망 다닌다. 아이와 있는 내내 엄마 구실 똑바로 하기가 쉽지 않다. 주스 한 통 와르륵 쏟아서 옷이며 의자며 다 적셔놓고 엎드려 그거 닦고 있는 엄마 등에 올라타 히히힝~말아 달려 히히힝~하면 이성의 끈이 끊어질락 말락 한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매 순간 벌어져서 통제광인 나는 늘상 불안하다. 뭔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애들에게 내가 소리 지르고 화내고 밑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이 닥치게 될까 봐 초조하고 겁이 난다.
그런데 지들이 좋아하는 할머니 따라 애들이 나가 주니 잠시간은 엄마 구실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글 쓰면서 내 구실 하니 얼마나 마음 편하고 좋은지.
9시 10분. 감자 캐서 시커메진 손으로 애들이 곧 들이닥칠 거다. 그전까지 쓰고 싶은 거 실컷 쓰고 방탕한 시간을 보내야지. 아침 설거지 따위엔 손끝 하나 안 댈 거다.
이렇게 내 구실 좀 하고 나면 다시 엄마 구실 할 수 있는 새 힘이 돋아나겠지.
들어오는 애들한테 오늘은 짜증 안 내고 친절하게 대해야지,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