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v 특유의 천장이 높은 외양을 좋아했고 힘좋은 디젤이니 여행 많이 다니는 내 성향에 맞겠다 싶어 고른 차였다. 중고차였지만 당시 차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옵션이 들어가 있었고 과연힘이 좋았다. 언덕을 오를 때 차가 힘들어한다는 느낌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서 나는 모든 차가 다 그런 줄 알았다.
단점은 엔진 소음이 심하다는 거였는데 특히 장거리를 달릴 때 라디오를 틀어 놓으면 라디오 소리가 잘 안 들릴 정도였다.
그래도 첫째, 둘째 키우는 내내 잘 타고 다녔다. 널찍하고 높은 트렁크에 킥보드 두 대 돗자리 두 장 장우산 네 개 모래놀이 한 박스 등등을 싣고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오갔다.
그렇게 애착이 쌓인 내 스포티지가 날씨가 추워지면서 비실거리기 시작했다. 신호등 대기 중에 갑자기 시동이 꺼지길 몇 차례. 주행 중에 또 시동이 꺼질까 불안해 얼른 수리 센터에 갔는데 고치질 못했다. 전기계통 문제인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알 수가 없다며 대구나 서울에 있는 본사에 가보라는 거였다. 시골에서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 봤는데 별 문제를 발견할 수 없단다. 막상 수리 기사님 앞에선 멀쩡한 척 덜덜거리며 시동이 걸려 있는 나의 스포티지.
수리센터 간 김에 자동차 전체 점검을 받아보니 타이어 갈 때도 됐고 엔진 오일이며 미션 오일 갈 때도 됐단다. 주행거리가 21만을 넘어가니 애가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이 차가 겨울을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신경 쓰였던 건 엔진 소음. 디젤차가 다 그렇다지만 차 안에서 대화할 때 항상 소리 지르듯이 말해야 한다는 게 참 싫었다. 차를 정비하면서 좀 조용한 차를 타고 싶다는 마음이 섰다. 그래서 간절한 소망을 모아 모아 배우자를 설득했다.
여보. 올해 넘어가면 스포티지 이제 고철값도 못 받는다. 올해 안에 팔고 한 푼이라도 더 받자. 겨울 돼서 또 얘 시동 안 걸리고 출동 서비스 부르고 그러는 거 지겹지 않니. 여기 봐봐봐. sm6 풀 옵션으로 판다. 2016년식이라도 sm6는 페이스리프트가 안 돼서 옛날 차 같지도 않아. 그리고 차가 묵직하니 얼마나 조용하겠어. 우리 적금 깨고 대출 조금 내면 돈 딱 되겠다.
내가 보낸 sm6 중고 판매 링크를 유심히 보던 배우자는 며칠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같이 차를 보러 가보자고 했다.
혹시 배우자 마음이 바뀔까 봐 주말이 되자마자 아침 일찍 애들을 깨워 대도시 중고차 매매 타워로 온 가족이 출동했다.
갖고 있는 현금이 없어 2016년식 sm6중 수중 현금과 금액대 비슷한 매물이 있는 곳만 찍어서 갔다. 꽤 여러 대를 봤는데, 풀옵션에다 가격이 가장 우리 형편에 맞는 차는 빨. 간. 색.이었다. 엔진 소음이 없었고 파노라마 선루프가 장착된 데다 시트도 새것 같았다.
그런데... 빨간색. 아니, 새빨간색에서 채도를 좀 낮춘... 산화된 와인색에 가까운 버건디 컬러.
2019년식 sm6 버건디 컬러와는 또 달랐다. 내 눈엔 그 색이 너무 못나보였다. 앞으로 10년은 타야 할 텐데 탈 때마다 눈 질끈 감고 타긴 싫었다. 그런데 또 가격이랑 옵션 생각하면 그만한 차가 없었다. 배우자는 색깔이 무슨 상관이냐며 이 정도 가격에 풀옵션 구하기 어려운데 자긴 맘에 든다고 성화였다. 딜러 측에선 오늘 차를 매입하면 나의 낡은 스포티지를 중고차 시세보다 조금 더 쳐서 사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지겹다 밥 먹으러 가자 난리 치는 애들과 마음을 정하라고 닦달하는 배우자의 행태를 견디며 중고차 매매센터 야외 주차장에서 30분을 서서 고민했다. 그날따라 바람은 왜 그리도 부는지. 머리카락이 달려라 하니 스타일이 되도록 고민 또 고민했다.
sm6를 빨간색으로 뽑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었을까.
우리나라 사람은 거의 흰색 아니면 검은색 아니면 회색으로 차 컬러 고르지 않나?
스포츠카도 아닌 중후한 외모의 sm6를 왜. 그런 색을 골라 온갖 옵션을 달고 꾸몄을까.
빨간색 sm6의 전 오너였던 당신이 너무나 궁금해지네요. 당신은 왜 그 색깔을 골랐나요. 내가 사는 시골에서 저 차 타고 다니면 '너 어제 어디 지나갔지? 니 차 봤다'하고 제보 수십 건 들어올 만한 색이라고요,엉엉.
결론적으로 난 그 차를 못 샀다.
사고 이력이 있긴 했지만 그날 본 다른 어떤 차보다 엔진 소음이 없던 그 차, 통풍 시트에 마사지 기능까지 추가되어 있던 그 차, 발매트까지 새것 같던 그 차를 난 결국 사지 못했다.
차가 기능이 중요하지 색깔이 뭐가 중요하냐는 배우자의 타박을 들었지만 무나니스트인 나는 도저히 빨간 차는 못 탈 것 같았다(전국의 빨간 차 오너님들 죄송합니다. 다만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저의 고루한 취향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중고차 매입 소동이 불발되고 나서 중고차 사이트를 몇 주 더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연금색 2016년식 풀옵션 sm6를 발굴해냈다. 이번엔 배우자 혼자 가서 차를 보고 그 자리에서 사 왔다. 딜러 측에선 캐피털을 끼고 구매했던 차라,바로 사 줘서 고맙다며 할인도 많이 해 줬다. 다만 내 스포티지는 정말... 고철값만 받고 팔았다. 운전 인생 첫 차라 사고 이력이 여러 차례 있어 어쩔 수 없었다. 흑. 흑. 흑.
10년 가까이 suv만 타다 승용차를 타면 뭔가 어색할 줄 알았는데 며칠 만에 완벽 적응했다. 너무 좋다. 시동을 걸어도 엔진 소음 없이 조용하다. 선루프 한 번 열어주면 애들이 꺅꺅 소리치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트렁크도 깊어서 온갖 물건이 다 들어간다. 디젤차처럼 언덕 막 치고 올라가는힘찬 느낌은 적지만 그래도 꽤 주행감이 안정적이어서 좋다. 이렇게 큰 기계를 내 맘대로 조작해서 거리를 다닌다는 게 재밌고 즐겁다. 어릴 적 변신 로봇 갖고 놀 때의 기쁨처럼, 어른이 되어 로봇보다 훨씬 더 큰 기계를 내 뜻대로 부린다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자는 주의지만, 가끔 주말에 아이들과 멀리 나갈 때 시동 꺼질 걱정 안 해도 돼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