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씨 Nov 15. 2022

세상 모든 민폐의 초상

진상의 굴레에 대한 단상

환절기다.


인즉슨 비염이 도래하는 계절이라는 거다.

나는 한 번도 비염 같은 알레르기 증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라 계절 변화가 인간의 신체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애 키우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일교차가 커지고 기온이 내려가고 습도가 낮아지기 시작하면 애들 코에서 홍수가 나기 시작한다. 아침저녁으로 콧물이 목으로 넘어가 쿨럭쿨럭 기침하는 소리에다 가 떨어져 나가도록 팽 푸엥 풱 코 푸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손수건을 휴지처럼 쓰는 통에 매일 콧물에 젖은 손수건 빨래로 손발이 바쁜 이 계절.


지금 한 달째 알레르기 약을 처방받아 먹이고 있는데 약 먹을 땐 좀 좋아졌다가 약 떨어지면 금세 마스크에 콧물이 흥건해져서 온다. 어제 마침 약이 똑 떨어져 두 녀석을 데리고 병원으로 출동했다. 병원에서 두 번 대기하기 싫어 두 아이를 한꺼번에 데려간 게 잘못이었다. 한 명씩 데려갔으면 서로 빡칠 일이 줄었을 텐데. 내 몸은 하난데 난리 치는 애는 둘인 상태를 나는 어쩌자고 자처했을까.


일단 병원에 데려가는 것부터 고난의 행군이다. 나 혼자 걸어가면 5분 거리인 내과까지 기본 30분이 걸린다. 바닥에 있는 돌멩이도 주워야 하고 같은 반 친구 만나면 인사도 해야 하고 나무에 매달린 구기자 열매도 따야 하고 암튼 할 일이 무지하게 많다. 둘 붙여놓으니 길에서 뒹굴었다 끌어안았다 머리 뜯고 싸웠다 아주 난리 부르스다.


어찌어찌 이 머리 검은 짐승들을 몰아 병원에 도착했다 해도 진료볼 때까지 대기하는 일은 2차 고난의 행군이다. 대기 번호 19번. 두 녀석은 벌써 지루하다고 병원 바닥에 누웠다. 기침 환자로 가득한 병원 바닥에 누워서 굴러다니는 우리 아이들. 다른 집 애들도 대기하면서 좀 칭얼대긴 하지만 우리 들은 그야말로 진상의 선봉에 서 있다. 좁은 대기 의자 사이를 뛰어다니고, 뛰어다니지 말라고 잡으면 내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고, 그 와중에 끊임없이 말싸움을 한다. 자매끼리 말씨름하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특히 첫째가 둘째를 얼마나 약을 올리는지. 아직 글자 못 읽는 둘째에게 '까막눈'이라며 성질을 돋운다. 둘째가 그 말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약이 오른 둘째는 펄펄 뛰며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소리 지른다. 나는 창피하고 민망해 쉿! 쉿! 을 외치며 두 녀석 등덜미를 병원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우리는  바람 부는 거리에서 삼십 분을 대기했다. 하. 하. 하.


한참만에 드디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이젠 진료실에 있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의자가 문제다. 가만히 앉아 의사 선생님께 목도 보여드리고 코도 보여드려야 하는데 그 의자를 계속 빙글빙글 돌리며 진료를 방해한다. 와. 진상. 진짜 진상. 의사 선생님 앞이라 울그락불그락하며 울컥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았다.

그래. 거기까진 내가 잘 참았다.


진상의 종점은 약국에서 찍혔다.

난리통 끝에 처방전을 받아 들고 약국으로 갔는데 둘이서 계속 진료 잘 봤으니(우리 아이들에겐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약국에서 파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난리였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분을 누르며 "진료를 잘 보긴 누가 잘 봤냐..."하고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도 내 신호를 못 알아채고 간식 사달라고 펄쩍펄쩍 뛰다 결국 마스크가 진열되어 있던 서랍장을 와르르 쓰러뜨렸다. 그 난리통에 진열되었던 마스크 포장이 찢기고 뜯겨 나갔다.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아 찢어진 마스크 값을 배상하고 약국에서 애들을 몰아냈다.


그런데 내 서슬 푸른 얼굴을 보고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칠 것을 눈치챈 첫째가 불쌍한 척 선수를 쳤다.


"엄마, 죄송해요. 우리가 장난이 너무 심했죠. (고개 꾸벅, 몸 배배 꼬며 애교, 손 잡고 조몰락조몰락) 엄마 말을 잘 들었어야 했는데. 장난감은 안 사주셔도 돼요. 우리가 많이 많이 잘못했으니까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갑자기 줄줄줄 나오는 존댓말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래선 교육이 똑바로 안 되는데. 아니 근데 급 존댓말 뭐냐고. 평소엔 부래야(내 별명)~김부래~부르며 까불면서. 내가 그만 웃어버리자 둘째까지 합세해 귀여운 척 깜찍한 척 애교 부리고 춤 추고 난리다.


하.

이 세상 모든 진상과, 그 모든 진상을 무마시키는 세상의 모든 애교.

가르친 적도 보여준 적도 없는 희한한 표정과 제스처로 그만 나를 웃겨버린다.

야단치기도 전에 김이 새버린 나는 "즈블 다음브트는 그르즈므르...." 입 앙다물고 한마디 하곤 싱겁게 집에 왔다. 집에 오기까지 또 30분 걸린 건 당연지사.

오는 길에 자매 싸움을 거듭 벌이다 흙바닥을 뒹굴어서 누릇누릇 더러워진 애들을 싹 씻기고 나니 애들은 모든 걸 잊었다는 듯 말간 눈으로 서로를 본다. 난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허. 허. 허.

이렇게  세상에 민폐 한 자락을 더하고 하루가 가는구나.

야! 야! 어디가! 뛰지 마! 쉿! 그만! 가만히 앉아 있어!- 같은 말을 더 이상 하지 않 교양있게 앉아 있을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오려나.


 

작가의 이전글 SM6를 빨간색으로 고른 사람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