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민폐의 초상
진상의 굴레에 대한 단상
환절기다.
그 말인즉슨 비염이 도래하는 계절이라는 거다.
나는 한 번도 비염 같은 알레르기 증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라 계절 변화가 인간의 신체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애 키우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일교차가 커지고 기온이 내려가고 습도가 낮아지기 시작하면 애들 코에서 홍수가 나기 시작한다. 아침저녁으로 콧물이 목으로 넘어가 쿨럭쿨럭 기침하는 소리에다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팽 푸엥 풱 코 푸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손수건을 휴지처럼 쓰는 통에 매일 콧물에 젖은 손수건 빨래로 손발이 바쁜 이 계절.
지금 한 달째 알레르기 약을 처방받아 먹이고 있는데 약 먹을 땐 좀 좋아졌다가 약 떨어지면 금세 마스크에 콧물이 흥건해져서 온다. 어제 마침 약이 똑 떨어져 두 녀석을 데리고 병원으로 출동했다. 병원에서 두 번 대기하기 싫어 두 아이를 한꺼번에 데려간 게 잘못이었다. 한 명씩 데려갔으면 서로 빡칠 일이 줄었을 텐데. 내 몸은 하난데 난리 치는 애는 둘인 상태를 나는 어쩌자고 자처했을까.
일단 병원에 데려가는 것부터 고난의 행군이다. 나 혼자 걸어가면 5분 거리인 내과까지 기본 30분이 걸린다. 바닥에 있는 돌멩이도 주워야 하고 같은 반 친구 만나면 인사도 해야 하고 나무에 매달린 구기자 열매도 따야 하고 암튼 할 일이 무지하게 많다. 둘을 붙여놓으니 길에서 뒹굴었다 끌어안았다 머리 뜯고 싸웠다 아주 난리 부르스다.
어찌어찌 이 머리 검은 짐승들을 몰아 병원에 도착했다 해도 진료볼 때까지 대기하는 일은 제2차 고난의 행군이다. 대기 번호 19번. 두 녀석은 벌써 지루하다고 병원 바닥에 누웠다. 기침 환자로 가득한 병원 바닥에 누워서 굴러다니는 우리 아이들. 다른 집 애들도 대기하면서 좀 칭얼대긴 하지만 우리집 애들은 그야말로 진상의 선봉에 서 있다. 좁은 대기 의자 사이를 뛰어다니고, 뛰어다니지 말라고 잡으면 내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고, 그 와중에 끊임없이 말싸움을 한다. 자매끼리 말씨름하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특히 첫째가 둘째를 얼마나 약을 올리는지. 아직 글자 못 읽는 둘째에게 '까막눈'이라며 성질을 돋운다. 둘째가 그 말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약이 오른 둘째는 펄펄 뛰며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소리 지른다. 나는 창피하고 민망해 쉿! 쉿! 을 외치며 두 녀석 등덜미를 병원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우리는 찬 바람 부는 거리에서 삼십 분을 대기했다. 하. 하. 하.
한참만에 드디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이젠 진료실에 있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의자가 문제다. 가만히 앉아 의사 선생님께 목도 보여드리고 코도 보여드려야 하는데 그 의자를 계속 빙글빙글 돌리며 진료를 방해한다. 와. 진상. 진짜 진상. 의사 선생님 앞이라 울그락불그락하며 울컥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았다.
그래. 거기까진 내가 잘 참았다.
진상의 종점은 약국에서 찍혔다.
난리통 끝에 처방전을 받아 들고 약국으로 갔는데 둘이서 계속 진료 잘 봤으니(우리 아이들에겐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약국에서 파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난리였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분을 누르며 "진료를 잘 보긴 누가 잘 봤냐..."하고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도 내 신호를 못 알아채고 간식 사달라고 펄쩍펄쩍 뛰다 결국 마스크가 진열되어 있던 서랍장을 와르르 쓰러뜨렸다. 그 난리통에 진열되었던 마스크 포장이 찢기고 뜯겨 나갔다.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아 찢어진 마스크 값을 배상하고 약국에서 애들을 몰아냈다.
그런데 내 서슬 푸른 얼굴을 보고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칠 것을 눈치챈 첫째가 불쌍한 척 선수를 쳤다.
"엄마, 죄송해요. 우리가 장난이 너무 심했죠. (고개 꾸벅, 몸 배배 꼬며 애교, 손 잡고 조몰락조몰락) 엄마 말을 잘 들었어야 했는데. 장난감은 안 사주셔도 돼요. 우리가 많이 많이 잘못했으니까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갑자기 줄줄줄 나오는 존댓말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래선 교육이 똑바로 안 되는데. 아니 근데 급 존댓말 뭐냐고. 평소엔 날 부래야(내 별명)~김부래~부르며 까불면서. 내가 그만 웃어버리자 둘째까지 합세해 귀여운 척 깜찍한 척 애교 부리고 춤 추고 난리다.
하.
이 세상 모든 진상과, 그 모든 진상을 무마시키는 세상의 모든 애교.
가르친 적도 보여준 적도 없는 희한한 표정과 제스처로 그만 나를 웃겨버린다.
야단치기도 전에 김이 새버린 나는 "즈블 다음브트는 그르즈므르...." 입 앙다물고 한마디 하곤 싱겁게 집에 왔다. 집에 오기까지 또 30분 걸린 건 당연지사.
오는 길에 자매 싸움을 거듭 벌이다 흙바닥을 뒹굴어서 누릇누릇 더러워진 애들을 싹 씻기고 나니 애들은 모든 걸 잊었다는 듯 말간 눈으로 서로를 본다. 난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허. 허. 허.
이렇게 또 세상에 민폐 한 자락을 더하고 하루가 가는구나.
야! 야! 어디가! 뛰지 마! 쉿! 그만! 가만히 앉아 있어!- 같은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교양있게 앉아 있을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