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하, 낡아가는 몸

by 수현씨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점심을 먹는 자리. 두런두런 자식 얘기 김장 얘기를 하다 몸 이야기로 대화가 흘러갔다. 자궁 내막증으로 세 달에 한 번씩 조직 검사를 해야 하는 분, 일자목 증후군이 심해 엑스레이를 찍으면 '지금 막 교통사고를 당한 듯함'의 진단을 받는 분, 다낭성 난소 증후군 때문에 미레나나 임플라논 주입을 고민하는 나. 이렇게 셋이 모이니 몸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삐뚤게 앉아 굳은 승모근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허리와 어깨의 끈질긴 통증을 개탄했다.


밥을 먹고 나오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공중 습도를 감지하고 미리 아파버리는 몸이라.


매일 걸어도, 한시간씩 요가를 해도, 폼롤러를 끌어안고 있어도 어떤 날은 통증이 진흙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이젠 아프지 않은 날은 없다. 덜 아픈 날이 있을 뿐.

20대에 차가 전복되는 사고 두 번, 30대에 출산 두 번을 겪고 나니 몸이 부쩍 낡았다.

내 생에 요즘처럼 열심히 운동한 때는 없다. 햇빛이 날 때 조금이라도 걷고, 요가를 하고, 마사지볼로 근막을 푼다. 그러지 않으면 골반을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잠들 수가 없으니까. 어두운 방에서 아픔을 참으며 뒤척이다 보면 아무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오롯이 나 혼자 견뎌야 하는 육신의 아픔 때문에 외로워져버린다. 괴롭다기보다 외롭다. 홀로 고단한 외로움과 싸우는 밤. 도무지 잠들지 못하는

밤. 무서운 밤.


낡은 몸에 적응이 잘 못하고 있다. 여전히 내 기억, 내 정신은 20대의 아픔이 없던 상태에 머물러있다. 육체와 정신이 일체감을 못 느끼고 있다. 분명 내 몸인데 때로 너무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진다.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에 나오는 몸 정체성 통합 장애를 앓는 사람처럼, 몸에 정신이 적응하지 못하고 불일치감을 느끼곤 한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불편한 느낌, 마음처럼 몸을 자유로이 쓰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쾌감을 죽을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니.

수용하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는 종류의 고통도 있다는 것을 진정 몰랐다.

지금까지 삶을 정복하고 경쟁하고 이겨 내야만 하는 개념으로만 배워온 전형적인 한국 사람인 나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신체에 대한 불일치감을 견디기가 어렵다. 아픔에 대한 참을성이 부족하다, 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괴로움은 신체에 대한 일체감을 잃어가는 것이다. 전엔 당연히 했던 일을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스스로 못하게 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삶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서 오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0분 이상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한다.

어깨가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똑바로 누워 자지 못한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몸의 결함들이 다가올 때, 그리고 그 결함을 낫게 할 도리가 없고 앞으로 더한 결함이 생길 거라는 예측만이 남아있을 때 불안감으로 마음이 어두워진다. 좀 자연스럽게 나이 듦을, 몸의 낡음을 받아들일 순 없는 걸까. 그저 이렇게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며 정신과 몸의 불일치감을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비가 와서인지 무릎이 뻣뻣하고 잘 올라가지 않아 발을 직직 끌며 자식을 마중하러 나갔다. 계단에서 뛰어내리듯 나온 아이는 밝은 얼굴로 '비 냄새 상쾌해서 좋다'한다.


낡지 않은 아이의 몸.

비를 기꺼워할 수 있는 몸.

새것 같은 아이의 몸.

자고 일어나면 에너지가 완전히 충전되어 있는 새 몸.

아이는 언젠가 닥쳐 올 몸의 아픔을 미리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내가 그러했듯이.


처음 보는 것처럼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찬찬히 훑어보았다.


나의 힘과 에너지는 이제 아이에게, 다음 세대에게 넘어갔음을 생각한다.

내 에너지를 받아 아이가 조금이라도 천천히 낡고 덜 아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거울이 비친 내 몸을 보며 조그맣게 읊조려보았다.


알로하,

알로하 오에.

나의 낡은 몸.









알로하 오에(Aloha‘oe)

[음악 ]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여왕인 릴리우오칼라니가 작사ㆍ작곡하였다고 하는 하와이 민요. ‘안녕하라 그대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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