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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Dec 05. 2022

감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넋두리에서 감사로 나아가는 길

나는 중등 논술 강사로 생계를 유지한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 있는 낮엔 내 아이를 돌보고, 밤에 배우자가 퇴근하면 바통 터치 후 학원에 가서 수업을 한다. 다섯 클래스를 맡아 수업하는데 그중에서 유난히 속 썩이는 반이 있다.

 

내 수업은 논술 수업이니까 중학교 내신 성적과 직결되어 있진 않다. 오히려 고등학교 모의고사나 면접, 자소서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고등학교에 오래 근무했고 중학교엔 2년밖에 있지 않았으니 내가 가진 커리큘럼은 고등 교육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중학생들 수업에서도 고등학교 수업 과정이 익숙할 수 있도록 수업 지도안을 짠다. CEDA 형식으로 토론을 하거나, 최근 이슈를 분석하거나, 고등 필독서를 읽고 해석하거나, 대학교 면접 지문으로 모의 면접을 보거나 하는 식이다. 보습학원처럼 모의고사 문제를 시간 재서 풀리거나 국어 문제집 풀이를 하거나 하진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중학교 내신 기간이 되면 시험 준비한다고 수업에 빠지는 애들이 생긴다.

5~6명이 정원인 수업에서 2~3명이 빠져버리면 짝을 맞춰하는 토론이나 모의 면접은 진행이 불가능하다. 한 주에 한 번 수업하는데 내신 준비한다고 1~2주를 빠지면 수업 연계성도 확 떨어진다. 보강을 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여러 학원을 다니느라 애들도 바쁘니까.


애써 짜둔 수업지도안을 갑자기 바꿔야 할 때, 내 수업이 내신보다 후순위로 밀릴 때는 속상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수업 준비하면서 든 시간, 시의 적절하게 준비했던 수업 자료들이 못 쓰게 되어버릴 때도 많다. 수업 자료를 버리면서 '내 수업은 나한테만 제일 중요하지'같은 생각이 들면 진짜, 마음이 상한다.


어제는 수업 시작 1시간 전에 학생 2명이 갑자기 수업에 못 올 것 같다고 카톡이 왔다. 한창 이태원 참사 관련해서 이슈조사 수업 2차시를 준비하고 있는데 5명 있는 수업에서 2명이 못 온다고 하니 기운이 쭉 빠졌다. 그리고 수업 1시간 전에 연락하는 건 또 뭔지. 이 반 애들만 유난히 이런 식으로 수업에 자주 빠져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었다. 게다가 수업 전날 따로 연락해서 수업 내용까지 알려줬는데 그땐 아무 말 없다가 수업 시작 직전에 갑자기 가족 여행을 간다고 빠진단다. 이러면 수업 준비를 새로 해야 한다. 학부모한테도, 애들한테도 짜증이 치밀면서 화가 났다. 내 수업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애들을 계속 끌고 가야 하나 싶어 회의감이 들었다. 수업 빈자리 나길 대기하고 있는 다른 팀도 있는데 이 수업을 그만둬버리고 다른 팀을 받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짜증 내면서 바닥을 굴러다니다 문득, 아무 잘못 없는, 아마도 수업 준비를 성실히 하고 있을 나머지 세 명을 생각했다.


한 바닥 가득 글쓰기 숙제를 내도, 두꺼운 책을 읽어오라고 해도, 수업 내용이 어려워도 불평 없이 재밌다며 수업에 따라오는 그 세 명을 생각했다.


그래서 급하게 수업 지도안을 다시 짜는데 한 아이가 수업 시작 30분 전에 학원에 왔다. 자기가 요즘 자주 늦었던 것 같다며 새로 글 한 편 쓰고 피드백받고 싶어 왔단다. 가족들은 다 서울에 놀러 갔는데 자기만 수업 오려고 안 따라갔다는 얘기도 해줬다.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마음이 뭉클했다.     

내가 너무 섣불리 아이들을 포기하려 했나 생각했다.

아이들이 학원 수업 빠지는 것을 쉽게 생각했듯, 나도 수업 그만두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학교였으면 학생들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도 수업을 그만둘 수는 없었을 거다. 나부터 학원 수업을 학교 수업만큼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이 확 들었다.

그래서 수업에 온 애들이랑 즐겁게 수업했다. 더 열과 성을 다해 강의하고 아이들 의견을 더 오래 들었다. 소수 정예가 되니 우리나라 정책이나 법, 교육과정과 관련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중학생 입장에서 낼 수 있는 해결책도 다양하게 다룰 수 있었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2시간을 보내면서, 학생이 몇 명이 오든 나는 맡은 수업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제부터 감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기승전결 갖춰서 완결된 문장으로 쓰려면 부담돼서 금방 그만두게 되니까 서너 개 정도만 간단하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감사 일기를 안 쓰면 오늘 수업 빠진 애들 때문에 짜증 나고 속상했던 강렬한 감정만 남을 것 같았다. 그 뒤에 분명 작고 소소한 고마움과 수업에서 얻은 즐거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제 적은 목록은 이렇다.


1. 여러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수업에 와 줘서 감사하다.

2. 배우자가 아이를 잘 돌봐 주어 밤에 수업에 집중할 수 있어 감사하다.

3. 자식들이 아프지 않아 걱정 없이 수업에 임할 수 있어 감사하다.

4. 학생들과 수업하는 것이 진심으로 기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할 수 있어 감사하다.


어제의 감사 일기는 이랬다.

오늘도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간단하게 몇 문장을 적어 볼 예정이다.

오늘의 감사는 무엇이 될까.

조금쯤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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