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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Dec 01. 2022

우체국에 훈남이 있었다

12월 1일.

드디어 신춘문예에 응모할 단편소설을 탈고했다. 하도 들여다봐서 신물이 날 정도였다. 이제 더는 못 고치겠다 싶어서 마침내 프린트했다. 표지도 만들었다. 00 일보 신춘문예 응모. 단편소설 부문. 원고량 80매. 표지까지 깔끔하게 쳐서 집게로 집었다. 원고를 클립으로 집어라 스테이플러로 찍어라 말들이 많은데 난 그냥 집게로 집었다. 그 편이 빼기도 좋을 것 같아서. 문구점에서 제일 고운 색깔 더블 클립을 골라 뒀었다. 더블 클립으로 깔끔하게 집은 원고 두 편을 들고 우체국으로 갔다.

 

우체국에서 대봉투를 사 정말 정성 들여 주소를 썼다. 어제 브런치에서 신춘문예라는 키워드로 응모하신 분들 후기 찾아 읽는데, 주소 잘못 적어서 응모가 안 됐다거나, 우체국 직원이 주소를 헷갈려서 바꿔 응모하는 바람에 기회를 잃었다는 분도 계셨다. 그런 후기 읽으니 나도 괜히 겁이 나서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명조체로 또박또박 주소를 써넣었다. 우편번호까지 맞게 썼는지 5번 확인했다. 봉투 뚜껑도 딱풀로 한 번 더 꼼꼼히 붙였다.


드디어 접수할 차례.


이 파트가 제일 민망하다.

신춘문예 접수할 때는 대봉투 겉면에 붉은 글씨로 크게 <신춘문예 응모>라고 써야 한다. 부문과 원고량까지 겉면에 다 쓰라는 신문사도 있다. 뻘겋고 큰 글씨로 나 신춘문예 냅니다 티 내면서 접수해야 하는 부분이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얼른 봉투 두 개를 직원분께 내밀고 고개 푹 숙이고 있는데, 직원분이 말을 거셨다.

"어. 신춘문예 응모하세요?"

"(귀 빨개지고 난리남) ㄴ....ㅔ.................."

"아, 그러시구나. 제가 문창과라 반가워서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보니 아니 웬, 시골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훈남이 앉아 있었다. 단정하고 각이 잘 선 셔츠 칼라에 부드러운 선의 안경을 끼고 날 쳐다보는 훈남.

아니 이 시골 우체국에 훈남이라니. 게다가 문창과라니!

훈남 파워에 호기심이 쪽팔림을 이겼다. 질문이 절로 나왔다.

"그럼... 글 계속 쓰세요?"

"(정적).... 아.. 네.. 이제는 안 써요."


이 무슨 긍정 부정문이란 말인가. 썼지만 지금은 안 쓴다는 말인가.

훈남의 미련 그득한 대답에, 실은 제가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이 있는데... 하고 초대장을 내밀기 직전까지 갔으나.

"특송 맞으시죠. 7480원입니다."

하는 한마디로 백일몽이 깨졌다. 그래서 조용히 돈 내고 우체국을 돌아 나왔다. 찬바람이 마구 뺨을 때리니 정신이 확 들었다. 웃음이 막 나왔다.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큭. 우체국에서 웬 미친년 될 뻔했다.


그건 그렇고 우체국 정직원이 되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된, 훈훈한 문창과 출신이라. 남의 인생을 함부로 상상하는 건 실례겠지만 궁금하다. 물어볼 수도 없게 된 훈남의 글 안 쓰게 된 사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정직원 파워가 그의 문필력을 대신 가져가 버린 걸까. 혼자 이런저런 생각하면서 집에 왔다.


아무튼, 오늘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이제는 시간만 내 편으로 만들면 된다.

간절한 듯 무심한 듯 시간을 흘려보내며 기다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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