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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Nov 30. 2022

신춘문예의 계절

잔인한 계절이여

등단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 11월은 특별한 의미를 품는 달일 것이다.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마감하는 신춘문예가 열리는 달이 바로 지금이다.

 

11월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한다. 올해 글을 더 썼어야 했는데, 더 고쳤어야 했는데 같은 후회가 밀려든다. 작년에도 마감일에 겨우 맞춰 덜덜 떨며 특송으로 단편소설 두 편을 응모했었다. 그때도 다짐했었다. 다음엔 이렇게 초치기로 마감하지 않겠다고, 시간을 두고 오래 고민해서 더 이상 건드릴 필요 없는 글을 내겠다고,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스스로 타협이 된 글, 완성됐다고 느껴지는 글을 응모하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고 오늘이 되었다.

11월 30일.

이미 마감이 지나버린 신문사도 몇이나 있다. 마음에 둔 신문사도 12월 5일, 8일, 9일 자로 마감이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틈틈이 세 편의 단편 소설을 썼는데 그중 한 편은 아무리 고쳐도 도저히 어디 내놓을 만한 수준이 못 돼서 컴퓨터 깊숙이 숨겨버렸다.

대신 지난 한 주간 나머지 두 편을 크런치 모드로 들어가 고치고 또 고쳤다. 영어 스터디도, 벗들과의 만남도 미루고 눈이 빠지도록 교정을 봤다. 그런데 보고 또 봐도 문장이 뭔가 튀는 구석이 있었고 오타도 더러 나왔다.  

오늘은 요가 수련까지 빠지고 아침부터 퇴고를 하는데 오후 12시쯤이 되자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으으으으. 더는 못 고치겠다.

한 문장에서 막혀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런데 불안해서 노트북 앞을 떠날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책상 근처를 서성이다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펴 들었다. 뭐라도 힌트를 건질 수 있길 바라서.

역시 하루키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락에서 일부러 그의 문장을 낱낱이 떼어 보았다. 촘촘히 보니 응? 왜 이런 문장을 썼지? 싶은 부분이나, 이 문장은 좀 어색한걸, 싶은 부분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이 단락으로 모이고 한 챕터가 되니 나름의 완결성과 응집성을 가지는 거였다. 그러니까, 거장의 문장도 책 전체적으로 보면 훌륭하게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개개의 문장 모두가 훌륭하고 아름답진 않은 거였다. 그런데 나는 내 글을 전체적으로 보기보다 문장 하나하나가 완벽하고 단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고치고 또 고치다 보니 오히려 어색하고 튀는 부분이 생겼던 거다.


결국 교정 보던 원고를 덮었다.

너무 들여다보니 오히려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온 것처럼 모든 문장이 이상해 보여서, 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기사단장 죽이기]를 마저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한 수 배우러 온 제자의 마음으로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 몸에 새기듯 읽었다. 특유의 빠른 전개감으로 독자를 이상한 세계로 빠뜨려버리는 그의 리드에 파도에 휩쓸리듯 몸을 맡겼다.

한 시간쯤 열중해서 책을 읽고 점심도 든든히 먹고 나니 힘이 좀 났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춘문예에 이렇게 목숨 걸 일인가, 도 생각했다.

너무 간절해지면 시야좁아지고 ㅈ너무 절망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사실 인생의 갈래는 여러 가지이고 신춘문예는 그 가지 중 하나일 뿐인데.

신춘문예라는 가지로 뻗어나가고 싶어서 이렇게 목숨 걸 일인가(여전히 좀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뒹굴어 다니는 꼴을 첫째가 보더니 한마디 한다.

"작가가 그렇게 진짜 하고 싶은 거였어? 난 그냥 취미로 하려는 건 줄. 직업으로 하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네."

아오.

진짜 하고 싶다고.

진짜 되고 싶다고.

작가가 뭔지 모르겠지만 하다 보면 알 것 같다고.

취미로 하는 거 아니고 목숨 걸고 하고 있다고!

첫째에 말에 열불이 나 다시 노트북을 켰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다 내 글을 고치니 하루키의 속도감이 내 손에도 붙어 막혔던 부분이 조금 나아갈 기미를 보였다.

그래서 일단 마무리했다.

오늘 저녁 5시.

신춘문예에 낼 단편 소설 두 편을 마감했다.

원고지 80매. 총 160매.

내일 첫째 하교하면 같이 손 잡고 우체국에 가서 대봉투에 <신춘문예 응모>라고 써서 특송으로 보낼 거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일단 했다.


아.

잔인한 신춘문예의 계절이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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