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 11월은 특별한 의미를 품는 달일 것이다.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마감하는 신춘문예가 열리는 달이 바로 지금이다.
11월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한다. 올해 글을 더 썼어야 했는데, 더 고쳤어야 했는데 같은 후회가 밀려든다. 작년에도 마감일에 겨우 맞춰 덜덜 떨며 특송으로 단편소설 두 편을 응모했었다. 그때도 다짐했었다. 다음엔 이렇게 초치기로 마감하지 않겠다고, 시간을 두고 오래 고민해서 더 이상 건드릴 필요 없는 글을 내겠다고,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스스로 타협이 된 글, 완성됐다고 느껴지는 글을 응모하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고 오늘이 되었다.
11월 30일.
이미 마감이 지나버린 신문사도 몇이나 있다. 마음에 둔 신문사도 12월 5일, 8일, 9일 자로 마감이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틈틈이 세 편의 단편 소설을 썼는데 그중 한 편은 아무리 고쳐도 도저히 어디 내놓을 만한 수준이 못 돼서 컴퓨터 깊숙이 숨겨버렸다.
대신 지난 한 주간 나머지 두 편을 크런치 모드로 들어가 고치고 또 고쳤다. 영어 스터디도, 벗들과의 만남도 미루고 눈이 빠지도록 교정을 봤다. 그런데 보고 또 봐도 문장이 뭔가 튀는 구석이 있었고 오타도 더러 나왔다.
오늘은 요가 수련까지 빠지고 아침부터 퇴고를 하는데 오후 12시쯤이 되자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으으으으. 더는 못 고치겠다.
한 문장에서 막혀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런데 불안해서 노트북 앞을 떠날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책상 근처를 서성이다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펴 들었다. 뭐라도 힌트를 건질 수 있길 바라서.
역시 하루키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락에서 일부러 그의 문장을 낱낱이 떼어 보았다. 촘촘히 보니 응? 왜 이런 문장을 썼지? 싶은 부분이나, 이 문장은 좀 어색한걸, 싶은 부분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이 단락으로 모이고 한 챕터가 되니 나름의 완결성과 응집성을 가지는 거였다. 그러니까, 거장의 문장도 책 전체적으로 보면 훌륭하게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개개의 문장 모두가 훌륭하고 아름답진 않은 거였다. 그런데 나는 내 글을 전체적으로 보기보다 문장 하나하나가 완벽하고 단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고치고 또 고치다 보니 오히려 어색하고 튀는 부분이 생겼던 거다.
결국 교정 보던 원고를 덮었다.
너무 들여다보니 오히려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온 것처럼 모든 문장이 이상해 보여서, 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기사단장 죽이기]를 마저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한 수 배우러 온 제자의 마음으로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 몸에 새기듯 읽었다. 특유의 빠른 전개감으로 독자를 이상한 세계로 빠뜨려버리는 그의 리드에 파도에 휩쓸리듯 몸을 맡겼다.
한 시간쯤 열중해서 책을 읽고 점심도 든든히 먹고 나니 힘이 좀 났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춘문예에 이렇게 목숨 걸 일인가, 도 생각했다.
너무 간절해지면 시야가 좁아지고 ㅈ너무 절망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사실 인생의 갈래는 여러 가지이고 신춘문예는 그 가지 중 하나일 뿐인데.
신춘문예라는 가지로 뻗어나가고 싶어서 이렇게 목숨 걸 일인가(여전히 좀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뒹굴어 다니는 꼴을 첫째가 보더니 한마디 한다.
"작가가 그렇게 진짜 하고 싶은 거였어? 난 그냥 취미로 하려는 건 줄. 직업으로 하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네."
아오.
진짜 하고 싶다고.
진짜 되고 싶다고.
작가가 뭔지 모르겠지만 하다 보면 알 것 같다고.
취미로 하는 거 아니고 목숨 걸고 하고 있다고!
첫째에 말에 열불이 나 다시 노트북을 켰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다 내 글을 고치니 하루키의 속도감이 내 손에도 붙어 막혔던 부분이 조금 나아갈 기미를 보였다.
그래서 일단 마무리했다.
오늘 저녁 5시.
신춘문예에 낼 단편 소설 두 편을 마감했다.
원고지 80매. 총 160매.
내일 첫째 하교하면 같이 손 잡고 우체국에 가서 대봉투에 <신춘문예 응모>라고 써서 특송으로 보낼 거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일단 했다.
아.
잔인한 신춘문예의 계절이 이렇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