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폭설이 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후려치는 눈보라 때문에 길을 걷기가 힘들었다. 오늘은 그 눈이 블랙아이스가 되어 아이들은 엉덩방아를 몇 번이나 찧으며 등교했다. 11월 말까지도 따듯해 겨울이 안 오려나보다 했는데 순식간에 추위가 몰려왔다. 그래서 알았다. 올해를 마무리할 때가 왔다는 것을.
이번 주는 신춘문예 예심 결과 발표 주간이다. 아무리 늦어도 크리스마스전에 발표가 난다고 들었다. 세계일보 예심 결과 기사가 어제 뜬 걸로 보아 다른 신문사도 슬슬 예심을 마무리하고 있을 거다. 기대와 절망 사이를 오가며 며칠째 밤잠을 설쳤다. 어제는 새벽 2시에 설핏 잠이 깼는데 내가 꿈에서 이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만족함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사랑과 진리의 한줄기 빛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그 사랑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곳에서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교회 청년부 시절 많이 불렀던 찬양이었다. 요즘은 묵상도 제대로 안 하고 찬양도 잘 안 들어서 이 노래가 내 안에 들어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홀로 꿈속을 헤매며 나는 이 찬양을 부르고 있었던 거다.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어떤 상황에도 스스로를 세워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이 찬양을.
모르겠다. 과연 어떤 상황에도 내가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을지를.
신춘문예는 하나의 통과의례일 뿐이고 결국 글을 계속 쓸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작가가 되는 길은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뭐가 겁이 나서 멈칫거리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지, 밑도 끝도 없는 우울로 빠져드는지 모르겠다. 연말증후군이라고 뭉뚱그리기엔 내 그림자가 너무 짙다.
이번 달 글쓰기 모임 주제는 <올해 내가 제일 잘한 일>이었다.
연말의 쓸쓸한 분위기에 매몰되지 않고자 내가 정한 주제였다. 주제를 정할 때까지만 해도 올해 못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코로나 걸렸을 때 빼고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을 했고, 100권이 넘는 새로운 책을 읽었고, 글쓰기 모임도 독서모임도 영어 스터디도 요가도 꾸준히 나갔다. 6월에 브런치 작가가 된 후로는 거의 매일 글을 써서 업로드했고 브런치 북도 네 권 만들었다. 단편소설 두 편을 마무리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항불안제 복용과 심리상담을 병행하면서 병적인 불안증도 어느 정도 잡혔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내가 한 일들, 내가 이뤄낸 일들로는 결코 나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매일 잠까지 줄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열심'으로 삶을 채운다고 해서 그것이 나라는 인간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출판작가가 된다 해도 혼자 있는 순간에는 결국 초라하고 날것인 나와 마주할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시간을 견디고만 있는.
나를 채우는 건 결국 입신양명 같은 류와는 전혀 다른 것들이다.
유난히 따듯했던 봄날 벚꽃 잎이 떨어진 길을 걸으며 벗들과 사진 찍었던 일
여름밤 눅눅한 강바람이 부는 산책길을 친구와 오래 걸었던 일
머리 서기 하면서 벽에서 발이 떨어졌던 순간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마음이 든든해지는 순간
심장을 꿰뚫는 듯한 책을 만나 읽고 또 읽어도 짜릿함을 느끼는 순간
이런 것들이 아, 내가 잘 살았구나, 마냥 못난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한다.
올해 가장 잘한 일은 꼽기 어렵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꼽을 수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내가 했던 일들을 줄줄이 트로피 세우듯 나열하며 점수 매기는 것보단 그 편이 낫다. '제일'이란 말 앞에서 내 1년을 평가하기 시작하는 순간 남는 건 점수 깎아먹을 일 밖에 없으니까. '내가 제일 잘못한 일'을 꼽으라면 낱낱이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그런 힘 빠지는 일은 일부러 안 하는 게 좋겠지.
아, 생각해보니 스스로 정말 칭찬해주고 싶은 일은 있다.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간 첫째 뒷바라지를 해낸 일.
학교에서 1시에 마치는 애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마중 나간 일.
그것만은 정말 잘했다. 게을러터진 내 인생에서 최고로 부지런했던 한 해였다.
<책과 우연들>에서 김초엽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작품은 단점이 없는 작품이 아니라 단점을 압도하는 장점을 지닌 작품'이라고.
내 삶도 그런 맥락에서 퉁치고 싶다. 빡치고 지랄 맞고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기뻤던 순간도, 감사한 순간도, 행복한 순간도 많았다. 기뻐서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남루한 내 삶을 압도해주기를 이밤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