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가 없는 게 좋아
슬램덩크 - 재미로 하는 운동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면서 팀 운동을 해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학교 체육 시간에 피구정도 해본 게 다다. 하지만 피구는 공을 무서워하게만 만들었을 뿐 운동을 좋아하게 해주진 않았다.
서울에선 여자 축구를 취미로 하기도 한다지만 내가 사는 시골에선 여자가 운동장을 쓰는 일은 전무하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넓게 쓰며 공 차는 애들은 다 남자애들이다.
나는 성인이 된 후 초등학생 조카와 놀다 우연히 축구의 기쁨을 알았는데, 공을 있는 힘껏 뻥 차서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 팀원에게 패스해 득점하는 즐거움은 다른 무엇과 대체하기 어려운 쾌감이었다. 팀 운동에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성취감과 고양감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직접 경험이 있기 전에는 팀 운동의 즐거움을 책으로만 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역할을 혁혁히 해낸 책이 바로 슬램덩크였다. 슬램덩크를 읽으며 농구 규칙과 용어를 익히게 되어 농구 선수를 좋아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슬램덩크는 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의리와 운동이 버무려진 '작품'이었다. 내가 슬램덩크에서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등장인물들에게 [운동에 죽자 사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어두운 서사] 같은 게 없다는 거였다. 그냥 즐거워서, 농구를 좋아해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 좋았다. 특히 슈퍼루키 서태웅이나 천재형 선수 윤대협 같은 인물에게 어떤 '서사'를 붙여주고 싶을 만도 했을 텐데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농구를 좋아해서 새벽부터 농구대 앞에 서고 밤늦게까지 코트를 떠나지 않는 그런 인물들로 그렸다. 그래서 슬램덩크를 읽으면서 농구라는 스포츠 그 자체에 몰입할 수 있었다. 슬램덩크를 처음 그리기 시작할 때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작품 흥행을 위해 연애라든가 패싸움 같은 요소를 넣었지만 후반부에서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농구 경기 그 자체에 집중해서 그렸다는 후일담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이번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감독을 맡은 애니메이션이다. 송태섭의 과거사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송태섭이 오키나와 출신이었다든가 등번호가 7번인 이유 같은 걸 알게 된 건 좋았지만 아버지 죽고 형 죽고 '내가 대신 살아서 미안합니다'같은 내용을 엄마에게 편지 쓰는 내용 같은 건 좀... 전설적인 산왕전 경기에 다소.... 집중도를 떨어지게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 보면서 울긴 울었다. 20년 전부터 슬램덩크 전권을 소장하고 틈틈이 읽어왔던 덕후로서 산왕전을 직관하는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영화를 보며 안 울 수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송태섭 형의 이야기가 중간중간 끼어들면서 경기 자체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졌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키가 170도 안 되는 송태섭이 자기보다 20센티나 더 큰 선수들을 상대로 우수한 플레이를 했다는 것, 언제나 두렵고 떨렸지만 여유 있는 척 경기를 감당해 왔다는 것, 단 한 번도 연습을 게을리 한 적 없다는 것, 결국 해외진출을 이루었다는 것을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정말 대단하다. 운동은 키나 팔 길이같이 타고난 신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송태섭은 그 틀을 깬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그림자처럼 업고 초-중-고등학교 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하면, 결국 농구는 그에게 유일한 휴식처이자 너무 절박한 것이 되고야 만다. 그러면 재밌게, 오래 하기 어렵다. 물론 영화에서 송태섭은 그 무게조차도 극복해 냈지만.
송태섭의 서사로 인해 나는 송태섭을 더 좋아하게 되진 않았다. 오히려 좀 안쓰러워졌다. 그가 플레이를 할 때 와, 대단하다, 하고 집중하기보다 아이구..저 불쌍한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영화를 보고 와서 다시 슬램덩크 전권을 정주행하고 있는데 송태섭이 나올 때마다 쯧쯧... 어린것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서태웅이나 채치수나 권준호를 볼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배우자는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백호를 전심으로 돕는 양호열 외 3인(대남, 용팔, 노구식)이 제일 좋다한다.
더빙판 자막판 번갈아가며 N회차 뛰는 사람들도 많던데 내가 사는 동네는 더빙판만 개봉해서 익숙한 한국 이름들이 나오는 버전의 영화를 봤다. 아무래도 나는 N회차는 안 뛰게 될 것 같다. 보면 볼수록 송태섭을 애처롭게 여기게 될 것 같아서.
그래도 슬램덩크는 역시 레전드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슬램덩크 애장판인데 제본이 잘못돼서 낱장이 다 떨어졌다. 그래서 어젯밤 당근에서 슬램덩크 신장재편판을 열심히 알아보았다. 영화 개봉 후 프리미엄이 붙어 너무 비싸진 전권 박스 세트. 젠장. 영화 열기가 좀 식고 가격이 떨어지면 꼭 다시 사고야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