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볼래요?》 책 중 [세상 속 아줌마 요원들의 세계]에 미수록된 내용을 담았습니다.
2021년,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블랙 위도우>가 오랜 기다림 끝에 개봉했다. ‘레드룸’이라는 사회와 단절된 공간에서 킬러로 길러지는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레드룸 수장인' 드레이코프'는 연고 없는 소녀들을 납치해 킬러가 되는 훈련을 받게 한다. 일정 나이가 되면 통과 의례로 포궁을 강제 적출하는데, 그 과정에서 전체 인원의 5% 정도만 살아남는다. 정신적, 화학적인 세뇌를 통해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도록 만든다. 여섯 살때부터 전문 킬러로 키워진 옐레나(플로렌스 퓨 분)의 말에 따르면 모든 레드룸 요원들은 자의식 없이 자라나 철저히 물건화物件化된다.
우리 사회에도 레드룸이, 그 안에서 훈련받은 레드룸 요원이 존재한다. 일정 시기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키워야한다는 사회적 세뇌에 단단히 붙들렸던 나의 20대가 그 예이다. 특정 나이까지 결혼을 못하면 '정상' 시스템에서 매장될까 두려워 상대에게 선택되길 바라며 나를 과대포장하고 진열하기에 급급했던 시간들이 나의 20대를 메웠다. 비단 나의 삶 뿐인가. 내 주변의 아줌마 친구들 또한 레드룸에서 훈련받은 요원들이었다. 학생 때는 공부 열심히 하고, 결혼해서는 시부모님 잘 모시고, 삼시 세끼 요리를 잘 해내고, 집안 살림 척척 하면서 미모도 잃지 않으며 자식 교육에도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고 세뇌 받은 요원 말이다. 그래서 만삭의 배를 하고서도 밥을 차리고 집안을 치우고 가꿨으며, 아기를 낳고서는 다이어트에 몰두해 애 안 낳았던 사람의 몸처럼 돌아가려 애씀으로써 ‘정상 가족’ 신화가 지배하는 레드룸 안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욱여넣었다.
그런데 깊은 밤, 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나?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거 맞는지 왜 따져보게 되나? 가족들은 내가 돌보고 있는데, '나'는 누가 돌보고 있나? 24시간 깨어있는 상주 가사 도우미를 자처하며 세상이 주입한 ‘행복한 가정 생활’ 시나리오에 따르다보니 나 자신이 없어졌네.
아줌마 레드룸 요원들
<블랙위도우>는 전직 레드룸 요원으로서 받았던 정신적 세뇌로부터 벗어나 슈퍼 히어로 집단인 '어벤져스' 멤버로 활동하는 나타샤(스칼렛 요핸슨 분)와 먼저 각성한 동료로부터 세뇌 각성제를 투여받아 자아를 되찾은 옐레나의 자매애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자매는 세뇌 각성제를 최초로 만든 과학자인 멜리나(레이첼 와이즈 분)의 도움을 받아 레드룸을 파괴하고 화학적 세뇌를 당한 레드룸 요원들을 구하러 목숨을 걸고 레드룸 본진으로 쳐들어 간다. 페로몬으로 타인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드레이코프와의 사투 끝에 마침내 나타샤와 옐레나는 레드룸을 폭파시키고 여성 요원들을 세뇌로부터 해방되게 한다. 그러나 요원들은 어릴 때부터 레드룸 안에서 허용되는 지식만 배웠기에 정작 레드룸이 파괴되고 세상으로 나와도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런 혼란스러움 속에서 그녀들은 함께 있기를 선택한다. 드레이코프와의 전투로 인해 다치고 상처 입은 모든 레드룸 요원들이 서로를 안고 일으켜 세운다. 손을 잡는다. 불확실한 미래속으로 함께 걸어가기를 다짐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각자 다양한 이유로 '여자-아내-엄마는 이렇게 살아야 돼'라는 사회적 레드룸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견디다 못해 뛰쳐나온 아줌마들, 그런 나의 아줌마 친구들을 이 레드룸 요원들과 같다고 감히 말해도 될까.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을 통해,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N번방 성착취 사건을 통해 자신이 갇혀 있던 레드룸에서 각성하여 나올 기회를 얻었지만 혼자서는 나아갈 바를 찾기 힘들기에, '각성한 아줌마'들은 절박하게 만난다. 배우자가 없고 어린이들이 기관에 간 낮 시간은 아줌마들의 시간이다. 그리고 사회적 통념에 균열 일으키기를 함께 계획하고 실행한다. 우리과 세운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반조리 음식 구매 및 사용을 저어하지 않음으로써 매 끼니 요리를 직접 해야 할 것 같은 기혼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타파한다.
2. 이번 명절에는 시가보다 친가를 더 먼저 가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뒷전으로 밀려났던 여성-가족의 위상을 세운다.
3. 배우자에게 주말 살림 전권을 넘김으로써 기울어진 가사노동의 장을 조금이나마 고르게 한다.
4. 성차별적이지 않은 그림책을 선별 구매하여 자식에게는 반드시 성평등한 가치관을 주지시킨다.
5. 가족, 친족간 호칭을 '00씨'로 통일함으로써 언어에 존재하는 여성 비하적 요소를 거부한다.
6. 성차별적인 말을 농담이라며 던질 때 절대로 웃어주지 않는다.
아줌마 요원들끼리 결의한 내용 중 실제로 실행된 항목도 있고 아직 실행을 주저하는 항목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각자의 레드룸에서 세상으로 나와 '정상가족' 틀에 대한 순응이 우리의 결말이자 미래가 아님을 알았을 때 얼마나 혼란스럽고 막막했던가. 하지만 같이 고민하고,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연대는 더욱 공고해지며 힘을 얻는다.
고통을 딛는 연대 - 아줌마 친구들의 세계
“오늘 복숭아 땄어. 좀 받으러 와.”
시골살이 7년 차.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을 열어 보라고 하고 싶다.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에는 현재 복숭아와 자두가 넘쳐 흐르고 있다. 그리고 2주 정도 지나면 알이 성근 달착지근한 단산 포도가 빈 자리를 메운다. 그 다음은 감과 사과다. 운 좋게 송이 버섯이 들어 있을 때도 있다.
나는 몰랐다. 사람들이 과일을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걸.
경상북도 산골에서 자라면서 유년기에는 엄마의 아줌마 친구들이, 결혼 후에는 나의 아줌마 친구들이 철철이 내 냉장고 야채칸을 빈 자리 없이 메워주었다. 손재주 없는 나를 위해 봄에는 연근 조림을, 여름에는 복숭아 병조림을, 가을에는 사과 칩을, 겨울에는 고구마 말랭이를 만들어주는 사람은 나의 모부가 아니다. 나의 아줌마 연대, 아줌마 친구들이다. 남들은 고등학교 때 인생 친구를 만난다는데 내 인생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이 아니다. 30대 중반에 만난 아기 엄마들이다. 사심 없는 환대, 서로가 겪는 고통에 대한 깊은 친밀감을 나는 애 엄마가 되어서 오롯이 누리고 있다.
나는 20대에 첫째를 낳은 터라 기존 친구들 중 결혼하거나 아이를 가진 친구가 없었다. 그리고 비혼 비출산을 선택한 친구들에게 결혼해서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옹졸한 마음도 있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스스로 더욱 고립되었다. 매일 야근하는 배우자에 대한 분노, 출산 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몸무게, 갑자기 잃어버린 직장생활자로서의 소속감, 잠 못자게 하는 자식에 대한 애증에 대해 말할 곳이 없었다. 매일 밤 잠들지 않고 우는 자식을 보며 얼마나 무력감이 몰려오는지, 미혼 시절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갔던 날들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운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아기가 낮잠을 하도 자지 않아 유아차에 우는 애를 싣고 동네 어귀에 있는 놀이터로 나갔다. 아기는 안아 달라 울고, 나는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띵해 오만상을 쓰며 유아차를 밀었다. 그 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아기보다 더 큰 소리로 울고 불고 떼쓰는, 개월 수가 비슷한 다른 아가를 만난 것이다. 그 아기도 내 아기처럼 아토피가 심한지 팔이 접히는 부분마다 긁어서 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 때 그 아기를 돌보시던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무심히 한마디 하셨다.
“잘 왔어요. 여기 그늘에 좀 앉아요.”
할머니는 쓰러지듯 벤치에 앉은 나에게 차가운 보리차를 건네 주셨고, 자기 손주에게 발라 주신다는 고가의 아토피 스틱을 내 자식 다리에 슥슥 발라주셨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셨다.
“지금 너무 힘들 때지요.”
툭 내미신 그 한마디에 내 마음이 얼마나 위로받았는지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다음날부터 매일 그 시간에 놀이터로 나갔다. 내 아기도 또래 친구가 있으니 우는 횟수가 훨씬 줄어들고 잘 놀았다. 그렇게 오전마다 만나 믹스 커피를 나누어 마셨고, 아토피에 좋다는 지실 열매를 사서 나누었고, 생떼 쓰기 좋아하는 자식 흉도 실컷 봤다. 지금도 동네에서 마주칠 때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버섯 달인 물을 나누곤 한다. 내 첫 아줌마 친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아줌마 친구 시대,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 것이다. 아기가 생기니 친구 스펙트럼이 20대부터 70대까지 넓어졌다. 미혼 때 친구 사귀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나의 두 번째 아줌마 친구는 영어 스터디에서 사귀었다. 신혼 여행 때 ‘당신 영어 발음 진짜 잘 들려. 경상도 사투리 그 자체야’라는 배우자의 평가로 인해 위축되어 있었던, 다른 세상 언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 그 갈망을 해소하고자 맘카페에 올라온 영어 스터디 멤버 모집 공지에 용기를 내어 연락을 했다. 이 시골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는데 웬걸. 고학력 경력 단절 여성이 여기 다 모여 있었다. 캐나다에서 영주권까지 땄다가 시골 남자랑 결혼하는 바람에 여기 계신 분, 영어 교육과를 나와 학교에서 근무하다 육아 휴직 중이신 분, 영어 강사로 대형 학원에서 일하다 아기 낳고 그만 두신 분이 영어 스터디 멤버였다. 나의 비루한 영어 실력에 바짝 쪼그라들어 있었는데 2시간이 지나자 영어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무도 내 발음에 대해서, 문법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듣고 절대로 끼어들거나 말을 끊지 않았다. 자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방청객 모드로 음~오~우와~하며 끝까지 들어주었다. 말하다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면 같이 눈물 흘려 주었다. 2시간 스터디를 하고 마치면 아줌마들만 아는 비밀 맛집에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철철이 상추와 고추와 단호박을 나누었다. 영어 스터디 마치고 나면 뒷 트렁크에는 늘 나눔 받은 흙 묻은 채소가 장바구니 가득 들어 있어서 혼자 큰 소리로 웃을 때도 있었다.
아줌마 친구들로부터 받은 것들은 너무나 따듯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무조건적인 수용이었다. ‘아침에 밥 다 차려놨더니 자식 녀석이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떼 써서 밥 싹 치워버리고 그냥 학교 보냈다’라고 하면 나의 아줌마 친구들은 ‘무슨 엄마가 그러냐’며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말은 절대 안 한다. ‘아이구 잘했어, 그 놈도 한 끼 굶어보면 정신 차리겠지’한다. ‘우리 남편은 지 빨래 다 개서 서랍장 위에 올려놓기까지 해도 서랍 안으로 정리 한 번을 안해’하면 ‘그런 XX는 확 반품을 해버려야 돼, 그런데 생산공장에서 받아줄지나 모르겠네’한다. 이러면 웃을 수 있다. 지나치게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다. 자식을 똑바로 키우고 있는지에 대한 후회와 자책, 배우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페미니즘이 다 뭔가.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 약자에 대한 배려가 페미니즘의 기조가 아닌가. 나의 아줌마 친구들 사이에는 서로의 고통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수용이 존재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골계미, 해학, 그런 게 다 아줌마들에게서 나온 것이라 확신한다. 이런 공감의 웃음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실질적인 힘이 된다.
느슨하고 사심 없는 환대
아줌마들은 자주 만나나, 하면 그렇지만은 않다. 아줌마들은 집안 경제 및 살림 책임 경영인으로서 빈 시간이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한 번 만날 때 제대로 만난다.
“호랑이콩 땄다. 모여.”
그 해 호랑이콩 수확자의 지시가 떨어지면 그녀의 집에 모인다. 애들이 등원한 9시. 껍질 까기가 시작된다. 까고 까고 또 깐다. 무릎을 맞대고 깐다. 서로 허리를 두드려주며 깐다. 그러면서 최근 알아 낸 가지볶음밥의 새 레시피를 공유한다. 당근을 채 썰어 얇게 전 부치는 법을 공유한다. 우리의 대화에는 경계가 없다. 요리 이야기하다가 7세가 되었는데 한글을 제대로 못 뗀 자식 이야기를 했다가 코로나 시국에도 명절에 가족모임을 해야 하냐고 한숨 지었다가 노 키즈존은 아동 혐오라고 침 튀기며 분노하기도 한다. 콩 껍질이 수북해지고 다 깐 콩을 나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중요한 얘기는 이따 전화로 더 하자’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깔 콩만 있다면 밤을 샐 수도 있다. 이렇게 한 4시간 콩 까고 나면 또 한 한 달간 못 만난다. 우리는 자식 키우느라 친가 및 시가 경조사 챙기느라 재난 지원금을 어디에 쓸지 계획하고 분배하느라 너무 바쁘니까. 그렇게 한 달 있다 이번엔 흙 묻은 상추 더미와 함께 만나면 또 너무 반갑다. 속에 고여 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아줌마 세계관 속에서는 서로에 대한 판단이나 비난이 잘 없다. 아줌마의 삶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나 자신을 내려놔야하는 일인지 서로 너무나도 잘 아니까.
3년 전, 부너미의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를 읽고 너무 부럽다, 나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나 공동체가 없다, 이 시골에선 다 틀렸다며 부너미 이성경 대표님께 투덜거렸을 때, 대표님께서는 '선생님은 선생님만의 페미니즘 공동체를 만드셔야죠'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는 속으로 '여기는 아직도 여자가 아침에 큰 소리 내면 물벼락 맞는 곳입니다'하며 지리적/문화적 이유로 불가능한 일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된다. 하면 된다! '보수적이고 유교적이고 여자들이 목소리 내기 어려운 곳'이라는 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가장 진보적이고 탈유교적인 이야기, 여자로서 살아가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절실히 필요한 곳이라는 거였다. 나만 해도 딸 둘을 낳은 후 친척들로부터 쏟아지던 실망과 비난으로 인해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책에는 뭔가 해답이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부모 교육을 듣다 만난 아기 엄마, 영어 스터디에서 알게 된 아기 엄마,요가원에서 운동하다 만난 아기 엄마들 중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과감하게 들이대 독서 토론 모임을 만들었다. 그렇게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던 이민경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엄마는 페미니스트>을 읽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레드룸 요원들을 깨어나게 했던 세뇌 각성제를 맞은 것 같았다. 내 내밀한 고통을 언어화시킨 문장들이 그 책들에 있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던 사람들도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자 자신과 자식을 대하는 삶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식에게 '너는 여자애가 왜 이렇게 칠칠치 못하냐' 라든지 '아들이라서 집안일은 아무리 가르쳐도 안 돼'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 라든지 '오늘 입고 온 옷 피부톤에 정말 잘 어울려요'같은 바디토크를 멈추고 '서로의 외모에 대해서 칭찬도 비난도 하지 말자'는 약속을 앞다투어 하게 되었다. 요즘은 독서토론 모임이 글쓰기 모임으로도 확장되어, 등단을 목표로 매달 단편소설 하나 이상을 써 내고 서로 합평을 하고 있다. 아내, 엄마, 며느리, 딸이라는 고정된 역할기대를 허덕이며 수행하다 책 읽는 사람, 토론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라는 다양한 가능성이 열린 역할로 존재하게 되니 더이상 일상이 괴롭지 않았다. 매일, 매달 할 일이 있고 목표가 생겼다. 얼마 전엔 독서토론 모임에서 청소년 미투 운동을 전국적으로 이끄신 양지혜 강사님을 초청하여 청소년의 성과 섹스에 대해 3시간이나 토론을 진행했다. 5년 전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경상북도 중에서도 시골에 속하는 이 곳에서 나눌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나의 아줌마 연대는 느릿 느릿 꾸준히 생겨났다.
연대 이후ㅡ 세상 속의 아줌마
식당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치우지 않았던 사람, 배달 후기로 식당에서 양을 알아서 ‘낭낭’하게 안 줬다며 욕하는 글을 쓴 사람이 '아줌마'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안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끝까지 파헤치고 공론화한 사람,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민식이 법 제정까지 이루어냈던 사람도 역시 ‘아줌마’라는 사실은 아시는지.
아줌마는 한 사람이 아니다. 아줌마 집단은 크고 넓으며 온갖 사람의 혼합체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은 사회의 정치/경제/스포츠/연예 분야에 밀접하게 닿아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그려지는 아줌마들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자식 교육에 미쳐서 ‘쓰앵님’정보를 주고 받거나, 은근히 자식 자랑 하면서 서로 비교하며 견제하거나, 한정판 명품백을 자랑하거나 부러워하거나.
<블랙위도우>에서도 여자들이 으레 하기 마련이라고 여겨지는 ‘내 새 옷 어때?’류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내 신상 옷을 보고 부러워하라’는 맥락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세뇌로부터 벗어나 처음으로 내 의지로 산, 내 취향이 처음으로 반영된 물건들을 사는 주체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나타샤의 동생으로 나오는 옐레나는 이 옷이 주머니가 많아서 얼마나 기능적인지 열정적으로 설명한다. ‘여자들이 옷 이야기 하는 것’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아줌마 레드룸 요원인 우리도 '내가 어제 산 새옷' 정보 나누기와 같은 지극히 아줌마다운 이야기들을 한다! 다만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보자면, 출산 후 변모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주안점으로 하여 여성 의류 산업에 팽배한 작은 몸 열망에 대해 성토한다. 임신 및 출산을 겪으며 몸 형태가 변하기 마련인데 그러면 일반 쇼핑몰에서 파는 '여자 옷'은 사 입을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아줌마 단톡방에서는 아줌마 세계에서 통용 가능한, 다양한 몸에 대한 이해가 있는 쇼핑몰 사이트를 공유한다. 허리를 조이는 라인이 없고 주머니까지 달려 있는 원피스을 발견하면 서로 열렬히 공유한다.
또, 자식 교육에 대해서도 오래 오래 이야기 나눈다. 사교육 시장에서 학부모에게 자행하는 공포 마케팅과 자녀 교육 환경에 내재된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교육을 시켜도 안 시켜도 내 자식의 학습상태는 동일할 수 있지만 ‘뭔가를 시키고 있다’는 전제 아래 내 불안감은 상쇄될 수 있으니까 당장이라도 학원에 보내든 학습지를 끊든 하고 싶어질 때, 먼저 자녀 교육의 길을 걸어가신 아줌마 선배님들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 지혜로운 그녀들과 상담을 하고 나면 다만 불안한 마음 때문에 내 자식의 일상을 좌지우지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게 된다.
자식 자랑도 한다! 고양이 키우는 사람이 고양이 자랑하는 것처럼, 책 좋아하는 사람이 책 홍보하는 것처럼 한다. 세상에 태어나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대상이 생긴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열심히 자식 자랑을 하고, 열심히 듣는다. 사랑 이야기, 얼마나 달달하고 행복한 이야기인가. 나는 자식 이야기가 걱정이나 염려로 점철되지 않고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로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편 흉도, 시가 흉도 본다. 하지만 그 ‘흉보기’는 불평등한 가사 노동의 분배에 방점이 찍혀 있다. 가만히 있는 남편 욕을 괜히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딨나. 가사노동은 사회적으로 저평가되어있는데, 그 이유가 가사노동에 대한 정성평가가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수치적 평가나 공인기관이 있다면, 그리고 공인된 정성평가에 따라 적절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집안을 돌보는 일이 이렇게까지 저평가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혼자 전 다 부치고 상 차리고 치우며 엉덩이 한 번 못 붙인 여성들의 가정 내 가사노동 불균등에 대해 고하는 곡소리가 전국에 울려퍼진다. 이런 이야기들을 다만 며느리들의 불평불만으로 차치하지 말고 국가적인 제도 정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미혼 시절엔 내 이야기를 잘 못했다. 도움이 필요해도 도와달라는 말을 못했다. 아줌마가 된 지금은 도와달라고도 잘 하고, 도와주기도 잘 한다. 주위를 보는 눈이 넓어졌다. 놀이터에서 모르는 애 엄마가 물티슈가 없어 쩔쩔매면 멀리서도 달려가 갖다 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항상 제일 마지막에 내리며 마지막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려 준다. 가방에는 사탕 대여섯 개를 항상 넣어다닌다. 언제든지 같이 노는 어린이들과 나눠 먹일 수 있도록.
내 자식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들, 키웠던 여자들, 키울 여자들 모두 나의 잠정적인 친구이자 동료이다. 직장을 그만 두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고 느끼던 나에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은 바로 아줌마들의 포용력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든지 내가 받았던 것을 척척 내어주고 싶다. 그들의 잠 못 잔 나날들과 아기를 안고 업느라 혹사당한 무릎과 어깨를 진심으로 위로하여주고 싶다. 그들이 찡그린 얼굴로 유아차를 밀며 놀이터에 도착했을 때 나의 그늘을 내어주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아줌마’는 흔히 멸칭으로 쓰이지만, 어떤 여자든지 돕고 싶고 나의 친구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 마음은 아줌마가 되고 나서 생긴 넉넉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