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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an 17. 2023

언제든 기회는 있다

올해 1월. 모든 공모전에서 떨어진 이후 글 쓰는 영역에서 매우 무기력한 생활을 했다. 글 쓰는데 쓰였던 에너지는 일상으로 분배되었다. 빨래를 색깔과 소재별로 나누어 세탁하게 되었고(그전엔 그냥 급한 것부터 마구 섞어 돌렸다) 일주일새 바닥을 몇 번이나 닦아 오랜만에 놀러 온 친구가 장판이 어쩌면 이렇게 하얗냐고 칭찬을 할 정도가 됐다. 화장실도 이틀에 한 번씩 타일 사이와 욕조 구석까지 솔로 밀어 닦았다. 신경을 쓰니 살림살이가 전반적으로 훤해졌다. 흰 옷은 확실히 하얬고, 색깔 옷 거무스름하지 않고 선명한 제 색을 띠었다. 구깃구깃하지 않고 먼지도 붙어 있지 않은 옷을 입고 다니는 애들을 보니,  음, 분명 기쁜 부분도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머리카락이나 화장실에 껴 있던 물때들이 사라지면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청소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줄어서 집에 있는 시간이 조금 마음 편해진 것이다. 통제성향이 강해서 완벽하게 관리되어 있지 않은 집 상태를 견디기가 어려워(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잘 안 치운다. 왜냐하면 한 번 시작하면 완벽하게 마무리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완벽주의 성향 있는 분들 제 마음 알아주실 것입니다) 집 밖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줄었다. 그만큼 집안일에 에너지를 많이 썼다. 글 쓰는 일을 외면하고 싶어서. 너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의 괴리를 견디기가 힘들어서 그랬다.


공모전 당선이 글쓰기의 처음과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책을 내는 길은 여러 가지라는 걸 안다.

그런데 책을 내려면 출판사나 문예지에 투고해야 하고, 그러면 또 무수한 거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가 아는 한 작가님은 출간하기까지 100군데 넘게 본인 글을 투고했다고 하셨다. 그럼 결국 출간을 하게 되더라도 100번에 가까운 거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도 된다. 나는 거절 파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기에 투고 기획안을 써 놓고도 미적미적, 숙제 미루는 아이처럼 노트북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었다.


러다 며칠 전 아이와 도서관 나들이를 하다가 서가에 친구가 최근 출간한 책이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

그때 느낀 내 마음은... 강렬한 선망이었다. 질투 같은 얄팍한 감정이 아닌 어떤... 내가 바라는 궁극적인 현실이 눈앞에 드러났지만 내 것이 아닌 데서 오는 슬픔과, 결국 자기 책을 출판해낸 친구에 대한 존경 같은 것이 뒤섞인 것이었다.

마음이 일렁였다. 그리고 웃기게도.. 나도 내 책이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싶다는 투지가 끓어올랐다.


집에 오자마자 멀리 치워뒀던 노트북을 꺼내 에세이 관련 출판사를 검색해서 투고용 메일 주소들을 알아냈다. 미리 써 뒀던 기획안을 다시 점검하고 원고도 최종 수정했다.

그리고... 뿌렸다. 내 글을 출간해 줄 만한 선한 출판사가 있기를 고대하며 간절한 마음을 담아 메일을 보내고 또 보냈다. 50여 군데를 내고 나니 목과 어깨는 딱딱하게 굳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너 곳에서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 빨리 연락 오는 곳은 100% 거절 메일이다. 출판사답게 거절 메일도 아주 정중하고 문장도 단정하다. 내용은 보통 이렇다.

 

좋은 원고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부에서 함께 검토하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희가 잘 만들어내고 또 잘 판매할 수 있을지 신중하게 논의해 보았지만,

장점이 많은 원고임에도 불구하고, 판매에 대한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 원고에 적합한 또 다른 빼어난 출판사가 있어서,

성공적으로 발행되고 독자들에게 널리 전해지길 기원합니다.


보통 거절 메일도 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이렇게 연락이라도 주니 어찌나 감사한지. 내 글이 성공적으로 발행되길 기원까지 해 주신다. 허. 허. 허.


아직 메일을 보내지 않은 출판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에세이를 출간하는 출판사가 바닥날 때까지 아직 나에겐 기회가 남아 있다.

결국엔 될 것이다. 결국엔 어떻게든, 가장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걸 내가 믿는다. 그 믿음 위에서 흔들리지만 않으면 된다.

언제든 기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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