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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an 10. 2023

수영을 시작했다

29살의 나는 성인 수영반 영재였다.

초급에서 한 달 만에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을 떼고 중급반으로 올라간 신예.

20대 중반 바다 다이빙을 자주 나간 터라 중성부력 잡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어깨도 유연해 팔이 잘 돌아갔다. 접영으로 수영장을 몇 바퀴씩 돌았다. 접영이 제일 쉬웠어요, 뭐 이런 말 함부로 하곤 했었던 ... 시절.


그 때 초급반 같이 듣던 아저씨가 '어떻게 그렇게 쉬지 않고 돌아요, 나는 10미터도 숨차 못 가겄네'하셨을 때 속으로 '나약한 말씀을 하시는군'하고 생각했다. 중급반에서도 금방 숨이 트여 자유형 열 바퀴는 기본으로 돌고 시작했다. 나는 중급반에서도 에이스였다. 킥턴만 배우면 고급반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단 3개월 만에 거둔 성과였다. 수영장이란 곳은 두꺼운 허벅지와 종아리가 쓸모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수영장 에이스로 떠오른 지 넉 달 만에, 수영그만두. 장장 9년 동안. 사유는 첫째 임신, 그리고 둘째 임신.

강백호처럼 빠르게 익힌 기술은 빠르게 잃어버렸다. 가끔 혼자 목욕탕에 가 발차기를 해보면 발놀림이 어둔해졌고 어깨와 목은 뻣뻣다. 15킬로가 넘는 애를 노상 안고 다니다 보니 허리 아작났다. 어느 날 놀러 간 수영장에서 접영을 해보려다 어깨에 바로 담이 와서 에구구, 에구구 앓는 소리 내며 하루종일 누워있어야 했다.


그러다 첫째가 9살, 둘째가 6살을 맞이한 올해.

첫째의 긴긴 겨울방학이 시작된 후 불어닥친 한파에 실내에서 애 에너지 뺄 곳이 필요해졌다. 그런데 시립 수영장이 새로 개장한 거다. 관리가 잘 돼 깨끗한 데다 어린이 레인이 따로 있다해서 큰맘 먹고 애 둘을 데리고 갔다. 애들이 혼자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 물 높이라 첫째는 판 하나 안겨주고 발차기시켰고, 둘째는 등에 태우고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물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만성적인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 물속 걷기로 어느 정도 몸이 풀린 것 같아 잠시 자유형 25미터를 시도해 봤다.

그런데 웬걸. 반 정도 가니 숨이 턱까지 차고 다리가 풀렸다.

아니, 9년 전의 나도 분명히 난데. 50미터 풀을 발 닿을 새 없이 돌던 사람 어디 갔나. 25미터도 못 간다. 어깨가 안 돌아가서 접영은 시도조차 못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오늘 애들 데리고 수영장엘 또 갔다.

그래도 어제 하루 해봤다고 오늘은 25미터를 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자유형으로만. 평영으로 하니 어깨랑 다리가 영 따로 논다. 배우자에게 애들을 맡기고 수영 연습에 매진해봤는데 영 늘지 않는다. 수영장 에이스였던 사람은 대체 어디에.

첫째 방학이 두 달이니 매일같이 가면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으려나.

그런데 수영 자체보다 애 둘을 씻기고 수영복 입히고 물에서 업고 다니고 다시 나와서 씻기고 수영복 빨고 옷 입히고 멀리 말려주는 게 너무 힘들다. 홑몸일 때의 나는 내 몸만 챙기면 되었으나 이제는 내 몸뚱이가 제일 뒷전이다.  


오늘 수영하면'10미터도 힘들어서 겨우 간다'라고 했던 초급반 아저씨 말이 자꾸 생각났다.


아저씨. 정말 죄송했어요. 20대였던 제가 뭘 알았겠어요. 이젠 그 말씀 백번 이해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뭘 모릅니다.


아무든 내일도 수영장에 가기로 했다. 그래도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수영장 물 잠겨 있다 보면 오후 5시쯤 저녁노을빛이 창문으로 들어오는데, 그 빛이 수영장 레인에 비치면서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거린다. 빛그림자가 맺히는 맑은 타일 바닥을 보 있으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

그래. 수영 실력이 무슨 상관이랴. 층고가 높은 수영장에 있으면 꼭 미술관에 온 것 같다. 물과 빛이 만나 부드럽게 일렁이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덤.

그리고 물에서 몸을 띄우고 천천히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물리적인 감각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하다.   

수영장에서만큼은 내가 발로 찬 만큼 확실히 앞으로 나아간다. 어디로든 발을 차고 손을 휘저어 나아 수 있다. 나는 그럴 수 있다.

그 걸 아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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