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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Mar 22. 2023

우울할 때는 익스펠리아르무스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할 때 내가 쓰는 방법 중 하나는 [해리포터:마법사의 돌] 1권을 펴드는 것이다.


두들리네 집에서 학대받고 자라던 해리가 호그와트 마법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을 때부터 나는 현실을 잊는다.


볼드모트와 똑같은 심의 지팡이를 고르는 해리 포터, 3/4 승강장에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해리 포터, 트롤과 싸워 헤르미온느와 진정한 친구가 되는 해리 포터가 남루한 현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나 또한 호그와트 입학생이 되어 해리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같이 마법약 수업을 듣고, 맥고나걸 선생님께 혼나기도 하고, 퀴디치 경기를 구경하며 소리 지르기도 한다.


아빠와 의절하고 나서 다시금 해리포터 시리즈에 천하기 시작했는데 오늘 마지막 시리즈인 [죽음의 성물]까지 다 읽어버렸다. 한 26번째 해리포터 정주행을 하면서 모르고 지나쳤던 작은 복선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몰리의 사촌오빠 파비안 프레웨트의 시계를 끝까지 차고 있던 해리의 모습이라든가 성장캐릭터 네빌의 변모라든가. 전엔 집중해서 보지 않았던 부분들을 이번 완독을 통해 또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작가였다면 바꾸거나 추가하고 싶은 설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해리가 만약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스네이프가 해리를 그토록 미워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시안계 캐릭터를 좀 더 많이 등장시켰어도 좋았을 텐데.

헤르미온느는 마법의 성물을 찾아 헤맬 때 월경 기간이 겹칠 수도 있었을 텐데 남자애들밖에 없는 그 텐트에서 월경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마법사만의 월경대가 있었을까?

헤르미온느는 해리나 론에 비해 가족 서사 설명이 적다. 마음을 깊이 나눌 여자 친구도 없었던 것 같다. 해리가 깊은 마음을 론과 나눌 때 헤르미온느의 마음은 어땠을까. 헤르미온느의 머글 부모에 대해 책 분량을 더 할애했어도 좋았을 텐데.

해리네 집안은 대대로 엄청난 부자였는데(해리는 마법사계에서 커다란 제약회사 집안 자손이다) 그가 부자 부모 슬하에서 자랐다면 아빠 제임스처럼 다소 거만한 캐릭터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해리의 캐릭터가 절대선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죽음의 성물] 마지막장을 덮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머글이라 킹스크로스역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어딘가에 마법 세계가 있어서 위즐리형제의 장난감 가게가 번성하고 있다고, 부엉이 배달부가 부지런히 우편을 나르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더러운 바닥을 일일이 손으로 문질러 닦아야 할 때나 음식이 말라붙은 그릇을 설거지할 때, 구겨진 빨래를 탈탈 털어 널고 있을 때 조용히 읊조린다. 스코지파이(더러움을 없애는 주문).


머글이 아니고 지팡이 소지자였다면 내 생의 남루한 문제들-부모와 의절을 겪고 고통스러워하는-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을까?


나를 이 세계가 아닌 다른 평행 우주에 갖다 놓고 싶어 해리포터를 읽고 또 읽는다. 마음의 우울이 가시지 않으면 며칠 내로 다시 [마법사의 돌] 1권을 꺼내 혹시 내가 놓친 설정이 없는지 샅샅이 뒤져볼 것이다. 올리밴더의 상점에 간다면 내 지팡이는 어떤 종류가 될까 궁금해하면서.


며칠째 해리포터 책만 붙들고 있으니 첫째가 책을 조금 뒤적이다 자꾸 나한테 섹튬셈프라 저주(온몸에 깊이 베인 상처를 내는 무서운 주문)를 외친다. 섹튬셈프라! 하면 난 프로테고(방어 주문)! 한다.


나에게도 마법 지팡이가 있어 마음이 아프지 않게 하는 마법약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숨을 내쉬면서 저녁밥을 안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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