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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Apr 19. 2023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해본 적이 있나요?

내 삶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노트북 앞에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삶을 아무리 뒤져봐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틀'에서 벗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런 내가 부끄러워 쓰던 글을 놓고 괜히 집안을 둘러보며 빨래를 개키기도 하고 애들이 어질러놓고 간 책을 꽂아 넣기도 하고 너무너무 하기 싫어 미뤄둔 설거지까지 마치고 왔다.

돌아보기 싫은 사실을 돌아보는 게 이렇게 어렵다. (설거지까지 다 하게 만들다니...!) 이제 더는 뒤적거릴 집안일이 없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기 전까지는. 무조건 뭐라도 써야 한다.


나는 틀에서 벗어나본 적 없는 사람이다.

남들이 시키는 일, 옳다고 생각한 일에 의문을 던지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학창 시절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왜 늦는지, 선생님 말씀을 왜 안 듣는지, 숙제를 왜 안 해 오는지 이해 못 했던 사람이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학령기를 마쳤고 취직을 했고 '결혼 권장나이'와 '임출육 권장나이'때 숙제하듯 그 일들을 해치웠다. 오히려 시기별로 마쳐야 할 일들을 권장 나이에 맞게 못 지킬까 봐 벌벌 떨었다. 둘째도 첫째랑 세 살 이상 터울이 벌어질까 봐 그야말로 숙제하듯이! 기를 쓰고(여기엔 정말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배란기에 어떻게 첫째를 일찍 재우고 그렇고 그런 분위기를 만드느냐부터...) 낳았다.


지금은 그럼 틀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는가.


애 둘 낳은 엄마란 고정된 역할을 갖고 있는 이상, 이미 너무나도 충실히 사회가 권장하는 틀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는 생각. 이 타이틀을 짊어지고 있는 이상 이미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데 직분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너미의 첫 번째 책, <페미니스트도 결혼할까요?>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결혼한 여성들을 향해 '가부장제의 부역자'라고 비판하는 말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인정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엄마, 아내, 며느리 노릇을 하며 성역할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니까요. 착취당하는 줄 알면서도, 억압인 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니 스스로도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삶의 어떤 부분은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두 아이(성별을 밝혀 보자면 둘 다 딸이다)와 함께 투블럭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 화장을 그만둔 것, 코르셋이나 압박 스타킹을 내다 버린 것, 내 약한 부분을 숨기는 대신 공유하려 애쓰는 것, 세상 모든 어린이들에게 친절한 마음을 갖게 된 것 또한 내 삶의 한 부분이다. 어쩌면 나는 결혼하지 않았으면,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약자를 배제하는 사회적 통념을 공고히 하는 사람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결혼 전엔 나보다 약한 존재나 어린 존재에 대한 관용이나 이해가 전혀 없었으니까.


지금 봤을 땐 조금 방향을 튼 정도여도, 삶의 끝에서 보면 그 결말이 아주 다르게 되어 있지 않을까.


당장 여성 연대 시위에 나간다거나 여성 인권에 대해 큰 스피커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삶의 조그만 부분에서는 매일 발버둥 치고 있다. 성별 편견을 없애는 그림책을 빌려와 아이들과 같이 읽는다든가, 학생들에게 장애인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수업안을 짠다든가 하는 방향으로. 틀을 벗어나 본 적은 없지만 조금씩 틀을 넓히고 틈을 벌리는 방향으로는 가고 있다.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

얼마 전 놀이터에 자식들을 데려갔을 때 생긴 일이다. 놀이터에 먼저 와서 놀고 있던 애가 '야, 너네 엄마는 여잔데 머리가 왜 이렇게 짧아?"하고 묻자, 자식들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아가며 한 목소리로 외치는 말.

"야! 머리 모양이랑 여자랑은 아무 상관없어!"


자식들의 이런 반응에서, 내가 그래도 선택지를 넓히는 방향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맞아. 성별이나, 나이나, 외모 같은 것들은 사실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 그냥 별개로 존재할 뿐이지. 여자라고 어떻게 해야 하거나, 나이가 몇 살이니 어떻게 해야 하거나, 장애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한다는 연결선은 세상이 만든 거야.

이런 이야기들을 아이들과 많이 한다. 내 삶은 이미 딱딱하게 굳은 부분이 많지만 아이들의 삶은 유연했으면 해서, 바람이 통과할 수 있는 간격이 있었으면 해서.


마무리는 부너미 대표 이성경 선생님의 문장으로 갈음하고 싶다.


우리가 말하는 페미니즘이 누군가(무언가)를 부정하고 후회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더 잘 살고 서로를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한 것임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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