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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un 13. 2023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 읽는 시

세상 모든 헤파이스토스를 위하여
일과 삶이라는 주제는 항상 양면을 다 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이 보람도 있고 그래서 즐거울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떨 때는 내 자아실현과는 무관한 상태에서 힘들게만 여겨지는 모든 이유는 내가 일의 주인인 동시에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힘든 노동에서도 인간은 숭고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기쁘고 즐겁게 노동을 해 온 존재들입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정재찬, 46쪽

 

아이를 돌보다 보면 벽에 부딪히는 순간이 오곤 한다. 타인 돌봄을 24시간 쉬지 않고 해야 하는(그렇다, 24시간이다. 잠잘 때도 아이의 요청-물 먹기, 똥, 오줌-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어느 정도 레이더를 세워 놓고 잠들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자로서 육체적/정신적으로 늘 고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돌보며 배 찢어지게 웃을 때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정재찬 작가님의 글처럼 일과 삶은 양면성을 지니기에 항상 좋은 순간만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쓸 뿐.


평소 시를 잘 읽지 못한다. 시는 너무 어렵다. 짧은 문장에 고도로 압축된 상념이 들어가 있어 그 압축팩을 열고 타인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 쉽지 않다. 시에 쓰인 한 단어 때문에 하루종일 우두망찰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의 도움을 받아 수십 편의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따듯한 시를 읽을 수 있었다. 책에서는 밥벌이, 돌봄, 건강, 배움, 사랑, 관계, 소유라는 7가지 챕터 안에서 다양한 시를 소개한다. 혼자 읽었다면 휘리릭 읽고 지나쳤을 시를 한 땀 한 땀 새기듯 읽었다.


배추 절이기

                       김태정


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

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

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다

소금을 덜 뿌렸나

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

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


점심 먹고 한번

빨래하며 한번

화장실 가며오며 또 한번

골고루 뒤집어도 주고

소금도 가득 뿌려주었는데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재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


생활 속에서 자주 무언가를 잊는다. 왜 먹는지, 왜 웃는지, 왜 우는지, 애당초 왜 살아가는지. 태어난 김에 산다고 말하기엔 내 생이 나에겐 너무 대단하다. 너무 크고 무겁다. 상처도 너무 날 것이고 슬픔도 너무 진한 것이다. 내 생이 나에게 너무 위대하고 굉장해서 소금에 잘 절여지지가 않는다. 숨이 잘 죽지를 않는다. 날 것의 자존심, 너무 날 것인 나의 생. 왕소금을 뿌려도 고개 숙여지지 않는 나의 슬픔.


결국 내 편은 시간뿐이다. 스스로 좀 편해지도록, 스스로 좀 성깔을 내려놓도록, 기다리는 일뿐이다. 소금에 치대어져 쓰라리고 아프면서 삶이 조금씩 순해질 거라 믿는다. 기다림의 시간이 나에게 필요하다. 책 말미에서 정재찬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상실로부터 뭔가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시를 좀 가까이해야겠다.

내 삶이 나에게 너무 중요해질 때 오히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다. 하지만 시를 읽음으로써 삶과 자아 사이에 거리감을 획득하게 된다. 적정한 거리감이 생활에 볕을 쬐어준다. 시가 볕을 쬘 공간을 마련해 준다. 타인의 문장으로 내 삶을 확인함으로써. 내 삶을 비춰보게 함으로써.


오늘 밤엔 책에 실린 시들을 다시 하나하나 혼자 조용히 소리 내읽어볼 테다. 그럼 갈기 세운 고집들이 조금이나마 머리를 숙이고 순한 눈을 뜰 수 있겠지.


시의 쓰임이란 그런 거니까.



- 인플루엔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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