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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Mar 11. 2023

가족이란 이름의 고통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가족 구성원으로, 그것도 연장자로 둔 것은 얼마나 사람을 소진시키는 일인가.

아빠의 알코올 중독은 아주 오래 내 삶을 좀먹어왔다.

잠자는 시간을 뺀 거의 모든 시간에 술이 취해 있는데, 그러면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얼토당토 없는 이유를 들며 내 탓만 반복한다.  


불과 몇 개월 전 갑자기 애랑 놀겠다고 찾아와선 놀아준답시고 애를 넘어뜨려 눈을 다치게 만들었었다. 애가 눈이 아프다고 우는데도 만취해 애가 다친 줄도 모르는 꼴을 보고 내가 "술 마신 상태의 아빠와는 만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었는데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제저녁 7시에도 전화해서 주정을 부렸고, 오늘 오후 2시에도 그 시간에 이미 만취해 애를 보러 오겠다고 난동을 피웠다. 아빠의 혀가 완전히 꼬인 목소리를 듣고 내가 '오늘은 애들이랑 못 놀 것 같다, 애가 미열이 있기도 하고 해서 그냥 집에 데리고 있겠다' 했더니 길길이 날뛴다.

내가 술 마시는데 너한테 무슨 피해를 줬냐, 술 마셨다는 이유로 애를 안 보여주는 건 나랑 인연을 끊자는 얘기다, 그러면 재산권이고 뭐고 다 포기하는 줄 알겠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발음도 똑바로 못하면서 반복했다. 그러곤 전화를 뚝 끊는다. 그리고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만취해서 전화폭탄 돌리는 것은 아빠의 오랜 습관이다. 자기 화가 풀릴 때까지 전화 걸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미성년시절 같은 집에서 살 때 아빠가 술취했을때마다 자는 사람을 깨워 잠 못 자게 하고, 똑같은 말을 끝없이 듣게 하고, 이유가 뭔지도 모를 잘못을 빌게 시킬 때마다 미치는 줄 알았다. 결혼하고 나면 그런 아빠로부터 해방될 줄 알았는데 같은 지방에 사는 이상 엮이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요즘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었다. 아침저녁으로 소량의 약만 먹어도 불안증이 조절되었고 밤에 잠도 잘 잤다. 그런데 이런 일이 닥칠 때마다  아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로 순식간에 끌려간다. 불안으로 부들부들 떨게 된다. 살 희망을 잃어버린다. 아주 나쁜 일을 저질러서 내 인생을 망가뜨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강한 믿음이 든다.


불안증이 확 도져서 일단 아빠 전화와 문자를 다 차단했다. 그랬더니 카톡으로 너랑 인연을 끊겠다, 재산권 다 포기해라 하는 내용을 보내왔다. 아니 돈을 벌 수 있게 된 이후 한 번도  원가정에 손 벌린적 없고  오히려 분기별로 내가 돈을 드렸는데 갑자기 재산권 얘기는  어디튀어나온 건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이대로 본인이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지면 오히려 부양부담을 지는 건 나일 텐데 무슨 생각인지 헛웃음밖에 안 나다.


내가 아빠 문제로 괴로워하자 곁에 있던 벗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변함없는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

그 사이가 영영 좁혀지질 않는다고.


오늘은 사실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다. 10년 만에 애들 없이 혼자 서울로 올라가 책 출간 파티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아빠는 가장 힘없고 초라했던, 아빠의 폭력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로 날 끌고 갔다.

고작 전화  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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