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해외 여행지는 필리핀이었다. 스무 살 겨울, 두 달간 교환학생 신분으로 떠난 곳이었다. 수능 때 외웠던 영단어들은 이미 깡그리 휘발된 상태였다. 기억하는 게 있었다 해도 지문으로만 읽은 영어와 입으로 나오는 영어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영어라곤 하이, 바이, 땡큐밖에 못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학생들을 위해 현지 대학에서 우등생들만 선발해 1:1 튜터를 붙여줬으나, 나는 잘 못하는 영어보다 타갈로그에 더 관심이 생겨 1:1 수업 내내 타갈로그를 열심히 배웠다. 집에 갈 때쯤엔 타갈로그로 기본 회화는 물론이요 온갖 욕과 사투리를 섭렵하고 있을 정도였다. 타갈로그어로 현지 학생에게 긴 편지를 쓰기도 했다. 우리를 가르쳐줬던 현지 우등생들도 처음엔 얌전히 공부만 가르쳐줬지만, 결국 피 끓는 청춘인지라 서로 많이 사귀었다. 학교에서 교환학생과 현지 학생 간 교제를 금지했던 것 같기도 한데 몰래몰래 다 사귀고 그랬다. 나중엔 집에도 초대받아서 같이 파티도 하고, 매일 밤 산미구엘을 몇 짝씩 마셨다. 교환학생으로 간 대학생들끼리도 두 달쯤 같이 먹고 자고 하니 너무 친밀해져서 밤마다 모여 온갖 얘기를 다 했다. 팍상한 폭포라는 유명한 관광지로 차를 대절해서 가고, 화이트샌드 비치라 불리는 아름다운 해변가도 거닐면서 아주 청춘 드라마를 찍었다.
처음으로 똑딱이 디지털카메라가 나왔던 시절이었다. 화소가 무지 낮아 조금만 확대하면 픽셀이 다 깨지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온갖 사진을 찍었다. 지금 그 사진은 싸이월드 어딘가에 몇 장 남아 있을 뿐 모두 어딘가로 사라졌다. 영어 공부 하라고 보내 준 프로그램이었을 텐데, 수업도 꽤 들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거라곤 타갈로그 욕설뿐이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우리는 눈물을 달고 살았다. 돌아가기 너무 싫어서! 아침엔 거대한 열대 관엽들이 이슬에 반짝이고, 교내 노점상에선 눈 돌아가게 맛있는 케이크를 500원에 팔며, 기숙사에선 삼시 세 끼에 간식까지 챙겨주는 데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나 경쟁이 없는 이곳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마닐라 출국장까지 너나 가릴 것 없이 울음바다였는데 희한하게도 입국 비행기를 타자 모두 차분해졌다. 그러곤 한국에서 먹고 싶었던 음식과 빠른 인터넷 속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행이 끝났음을, 일상으로 돌아와야 함을 한국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비행기에서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때 기억이 얼마나 자유롭고 좋았던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뭔가 일상의 압박이 심할 때 필리핀 꿈을 꾸곤 한다. 꿈속의 나는 스무 살이고, 친절한 필리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혹은 그늘에 누워 가루 주스를 마시고 있기도 한다.
이렇게 필리핀에 다녀온 후로 나는 필리핀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필리핀 사람을 만나면 오랜 친구를 만난 것만 같았다. ‘나는 따가이따이 근처에 머문 적이 있다’하며 대화의 물꼬를 트곤 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필리핀의 여러 섬을 여섯 차례나 더 방문했다. 운이 좋았던지 그때마다 현지인들에게 환대받았고 그들의 집이나 축제에 따로 초대받기도 했다. 물론 현지 돈 환율을 잘못 계산해 어마어마한 바가지를 쓰기도 하고, 오토바이 기사가 엉뚱한 곳에 내려줘서 황망하게 길에 서 있은 적도 있기는 했지만.
내가 여행이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이전의 일들로,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의 신 손에 맡겨져 있었다. 숙소도 현지에 도착해서야 직접 발품을 팔아 예약해야 했고,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가야 했다. 호텔이나 관광지 정보는 모두 여행 책자에서만 알 수 있었다. 들고 온 지도와 책자가 나달 나달 해질 때까지 손에 들고 다녀야 했다. 당연히 자주 길을 잃었고, 누가 봐도 여행객 모습이라 자주 소매치기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기쁨을 맞이하기도 했다. 길을 잃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쩔쩔매자 지나가던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나를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도 했고, 현지인들만 아는 멋진 예배당에서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했으며, 여행 책자에 소개된 것보다 훨씬 맛있는 로컬 맛집을 발견하기도 했다. 현지 사람들에게 값없는 도움을 받으면서 조금씩 여행의 기쁨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국에 온 여행자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도 여행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마음이다.
나의 두 번째 여행은 1년가량 호주에 머문 것이었다. 대학에서 친했던 친구들과 모두 소원해지는 사건이 있고 나서 충동적으로 휴학계를 냈고, 반년 정도 임용고사 준비한답시고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가 있던 지인의 추천으로 급작스럽게 호주로 떠나게 되었다. 아는 것 하나 없이 당장 머물 숙소만 예약해서 떠났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어있지 않던 때라 오직 여행책자나 먼저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떠난 사람들의 경험담으로부터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막연히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하고 시드니에 첫 발을 디뎠던 나는 스트리트가 얽히고설킨 시드니 도로 사정에 익숙해지는데 아주 오래 걸렸고 지독한 길치이기도 했어서 삼십 일 동안 예순 번 길을 잃었다. 그러다 운 좋게 교포가 운영하는 스시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주문받아도 될까? 뭐 먹을 거니? 알레르기 있니? 이 음식 구성이 어떤 건지 아니? 음료도 시킬 거니? 이 음식엔 이 음료가 어울려. 포장도 할 거니? 계산해 줄게, 같은 생활 영어만은 아주 인이 박히도록 할 줄 알게 되었다.
당시 호주 달러 환율이 확 뛰어서 꽤 돈을 벌었다. 모은 돈으로 한 달 동안 호주의 해안가를 따라 여행했다. 그러고도 백만 원 정도를 남겨서 귀국했다. 대학생에겐 큰돈이어서 마음이 든든했던 걸로 기억한다.
호주에 1년간 머문 일은 나라는 사람을 전혀 다른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데, 귀국하자 친구들이 모르는 사람 같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먼저 생전 해보지 않았던 육체노동과 서비스 노동을 오래 함으로써 인간관계가 능숙해졌고(그전엔 고집이 셌고 다른 사람 마음을 잘 헤아릴 줄 몰랐다), 주 단위로 월급 받고 집세를 내던 습관 때문에 돈 계산이 정확해졌으며, 언제든지 다른 나라로 떠날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 오래 준비한 임용고사에서 탈락했을 때 나는 거의 한 달간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하며 나의 무능력에 대해 묵상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고 아침 해가 뜨는 걸 보면 무기력감이 몰려왔다. 불안증이 도지면서 그야말로 1초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험 직전의 긴장 같은 것이 심장을 조여들었다.
그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여행이었다. 호주에서 남겨 온 백만 원을 이때 요긴하게 썼다. 따듯한 친구들이 있었던 필리핀으로 떠나고 싶었고, 마침 세부 특가 항공을 발견했다. 숙소를 알아보고 여행 동선을 짜는 동안 내 상태는 서서히 호전되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다른 사람이 나를 실패자로 볼 것 같은 열패감이 세부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가까운 미래로 삶의 눈금이 조금씩 이동했고, 마침내 세부에 도착했을 때 내 마음은 온전히 현재에 있을 수 있었다. 숙소까지 택시 호객꾼을 피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걸어야 했고, 예약한 방을 문제없이 받기까지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했으며, 바다 수영을 할 땐 빠져 죽지 않도록 팔다리를 힘껏 내저어야 했고, 망고 하나를 사려해도 장사꾼과 흥정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순간순간에 몰입해야 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현재에 집중하는 사이 두려움과 불안은 조금씩 원경으로 물러났다. 일주일 정도를 남국의 햇살 밑에서 보내자 그늘지고 축축했던 마음이 조금씩 말랑해지고 보송해졌다. 물컹거렸던 부분이 해를 받아 딴딴해진 느낌이었다. 시험 실패자라는 타이틀로부터 벗어나 맛있는 망고를 잘 고르는 나, 예쁜 물고기들을 잘 찾아내는 나, 오래 수영할 줄 아는 나 같은, 어떤 사람도 아닌 그냥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통해 굳어졌던 나의 틀을 벗고,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나를 잊고, 그저 살아있는 한 존재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행의 의미는 자아 찾기가 아니라 지나치게 두터워진 자아를 벗어버리는 데 있었다.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머릿속에 갇혀 있었던 경험을 언어로 형상화해 끄집어내고 나니 나를 통과했던 여행의 의미가 조금씩 선명하게 다가온다. 필리핀에서는 외국에 대한 호감과 여행의 기쁨을, 호주에서는 이방인으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떠나지 않고는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돈이 조금만 모이면 일본으로, 라오스로, 베트남으로, 탄자니아로, 타이로 떠났다. 어디를 가는지보다 집을 떠나, 일상을 떠나 생경한 곳으로 떠나는 것에 방점을 두었다. 낯선 땅에서 나는 물과 그 물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익숙지 않은 언어를 서툴게 입에 담으며 ‘나’라는 유기물은 야금야금 변화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엔, 그 나라의 사람과 문화 같은 것이 뒤범벅되어 짜인 옷 같은 것을 엷게 걸치게 된다. 그 옷을 입은 나는 떠나기 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된다.
물론 다시 안락한 집에서 늘 하던 일을 반복하다 보면 그 옷은 조금씩 벗겨진다. 그래서 다시 헐벗은 상태, 내가 아는 것과 가진 것들로만 가득 찬 상태가 되면 또 어딘가로 떠나야만 한다.
나에게 여행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무사안일함만 추구하는 상태를 깨뜨리고 나아가 이국의 땅을 헤매고 다니다, 훗날 그 이동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것.
그러기 위해 오늘도 떠날 계획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