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배는 빼곡했다. 판촉물로 받은 색색의 플래그가 페이지마다 붙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잊으면 안 될, 결코 잊고 싶지 않은 문장들로만 가득 찬
<대온실 수리 보고서>.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책에 실린 단어가, 문단이, 문장이 나를 이해했다. 나는 깊이 이해받았다. 노트에 필사한 문장이 그득 찼다. 어떤 문장은 감히 따라 쓰기조차, 감히, 내 손에서 이런 문장을 피어나게 해도 될까, 싶은 것들이었다. 내 마음이 그랬다.
경애의마음.
김금희 작가의 글들은 어떤, 나도 몰랐던 무르고 약한 부분을 기꺼이 어루만진다. 아주 조심스럽게. 함부로 들어오지 않고. 먼저 자신의 무른 부분을 내어 보임으로써.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 하고 조용히 말해줌으로써. 사람이 줄 수 없는 그런 위로를 그의 글을 통해 받는다. 이토록 충만한 위로와 이해를 책 읽는 내내, 오롯이 내 것으로 쏟듯이, 빛이 쏟아지듯이 받았다. 아주 추운 곳에 혼자 서 있다가 따듯한 물속에 스윽 들어간 것처럼 책을 들고 있는 내내 마음이 포근하고 다정했다.
"아무도 누구도 관심 없다, 나에게,라고 더 정확히 되뇌면 그 차가운 말에 마음까지 얼어붙을 듯하면서도 곧 그것에 지지 않겠다는 미약한 저항감이 들곤 했다. 음울함의 풀장으로 뛰어드는 건 어쩌면 어떻게든 힘을 내어 수면 밖으로 나오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불면과 불안, 우울로 마치 목 끝까지 물에 잠긴 듯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데 그 고통은 너무나 나만의 것이라서 누구한테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절망의 우울을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는 사실 어떻게든 힘을 내어 수면 밖으로 나오고 싶었던 걸까.
우울로 침잠하며 스스로를 생채기내던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이 문장을 솜이불처럼 뒤집어쓰고.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은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
"그럼. 쇠기러기 많이 잡아먹고 흰꼬리수리랑 다투고 귀찮게 하는 까마귀들 무시하면서 잘 지내다 시베리아나 몽골로 갔겠지."
"정말 멋있어, 하늘에서 사냥할 때 화살처럼 꽂혀."
"맞아,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 마마무(흰죽지수리)는 대체로 나무에서 뭘 했지?"
"기다렸어."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하지만 기다리는 것이 나타나면 그때는 반드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린다.
나조차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을.
이맘때는 늘 바빴다. 신춘문예 응모일을 체크하고, 원고를 최종점검하고, 어느 신문사로 보내야 할지 고심하고, 특송으로 보낼지 일반으로 보낼지 고민하느라. 그리고 언제쯤 결과가 나올지 신춘문예 준비 카페에 들락거리며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혹은 이미 연락이 갔다는, 그런 소식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그리고 곧 깊고 깊은 우울海로 풍덩, 빠져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단편소설 응모를 하지 않기로 했다.
신춘문예 일정을 뒤져보는 것을 멈췄다.
이번에 김이설 작가님의 합평반 수업을 들으면서 한 가지는 확실히 배웠다.
당선될 글과, 아직 덜 무르익은 글을 구분하는 법.
내 글을 덜 익었다는 것, 을 8번의 합평 수업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로 한다.
올해의 목표는 100% 읽고 100% 쓰는 것.
50/50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작가님이 가르쳐주신 것처럼. 100 읽고 100 쓴다. 그것을 붙든다.
언젠가는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거대한 산처럼... 이런 식상한 비유밖에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정말 거대한 산처럼...
내 앞에 서 있다.
지금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리고 부시다.
이런 아름다운, 여린, 따듯한,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글을 언젠가 쓸 수만 있다면. 그런 확신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