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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6시간전

이제야 달리기 시작한 사람의 변

강변에 내려다보이는 도서관에 앉아 글을 쓰다 보면 이 추운 날씨에도 달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달리는 사람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밝은색 러닝화를 신고, 날씨에 아랑곳 않고 바람막이 하나 입고, 양말을 올려 신고, 코를 덮는 얇은 마스크 같은 걸 올려 쓰고, 하얀 입김 훅훅 내뱉고 있다.


달리는 것도 유행을 타서 이놈이나 저놈이나 달리기를 한다... 고 경력이 오래된 이들은 새삼 '트렌드'에 입성한 초보 러너들을 비웃는데... 나도 이제야 달리기에 발을 들인 터라 할 말은 없다. 다만 조금 못마땅. 왜 세상은 뉴비를 고깝게 보는가... 팔랑귀들이 물결에 휩쓸려 이제라도 달리기 같은 좋은 전신운동에 입문한다면 그 또한 좋은 일 아닌가... 뭐 이런 생각.

아무튼 요즘 내 알고리즘은 초보 러너 올바른 자세, 달릴 때 발 똑바로 놓는 법,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가성비 운동화, 부상 없이 오래 달리는 법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스물여섯 살 때 별다른 준비 없이 10km 마라톤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단체로 마라톤대회에 참가한다길래, 뭐 애들도 관리할 겸 나도 어디 한 번, 아주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서를 냈었다. 그때 나는 애들 체력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 수업시간만 되면 병든 닭처럼 비실대서 내가 쟤들보단 잘 달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출발점에 섰고... 심지어 제대로 된 러닝화도 신지 않았았다! 집에 굴러다니던 얇은 운동화 하나를 꿰어 신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평탄해 보이던 코스는 어느새 언덕길로 들어섰(어디로 달리는지 코스조차 체크하지 않았다)  내가 들숨날숨 거칠게 몰아쉬며 기듯이 나아갈 때 학생들은 가볍게 날 제치고 앞서갔다. 더구나 학생들은 5km 코스를 신청해서, 20분 만에 완주한 뒤 참가자들에게 나눠주는 해장국을 먹고 있는 애들도 있었다. 해장국에 든 시래기를 씹으며 빙글빙글 웃는 아이들을 지나서 홀로 도로를 달릴 때... 이미 노련한 러너들은 저 앞에 있어서 러너들을 보호하는 봉고차며 경찰차들도 이미 까마득히 먼 곳으로 나아가고... 그러다 문득 편의점이 옆에 보여서, 내가 지금 이탈해서 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휘청휘청 뛰었다. 결국 1시간 15분이 걸려서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주최 측에서는 모든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걷는 것에 가까운 속도로, 하지만 달리는 듯한 포즈로 들어오는 걸 보고 일하는 사람이 깜짝 놀라 '아직도 안 끝났었어요?' 하며 정리하고 있던 도금 메달을 쓱 건네주었다. 그놈의 메달. 집에 오자마자 어딘가에 처박 뒀는데 이사하면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래도 좋았던 점은 있었다. 바닥을 거의 드러낸 해장국을, 내가 마지막으로 싹싹 긁어서 건더기 그득하게 먹을 수 있었던 거. 국물이... 끝내줘요.


아무튼 치욕스러웠던 마라톤 경험 이후로 달리기는 내 삶에서 멀어졌고 무라키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아무튼, 달리기>를 읽으면서 잠시 달리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솟기도 했으나 10km 달린 뒤 엄지발톱 두 개가 몽땅 빠졌던 기억을 되살리며 훠이훠이 다시는 안 달려, 하고 다잡곤 했다. 주변에 달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다이소에서도 러닝 아이템을 쉽게 살 수 있게 되고, 연예인 누구누구가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도 내 마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결국 나를 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일이 스르륵 다가왔다.


올해 9월 경 일이다. 몇 해 전 '수현 씨는 나한테 아랫사람이지, 친구가 아니라'하고 말함으로써 친구관계를 정리했던 한 언니와 이상하게 계속 마주치게 되면서...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하려는 나에게 그 언니가 다가와 '수현 씨, 왜 인사를 안 해? 지역에 살면서 자영업 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하고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나는 괴로워졌고 그 언니를 피하려 동선을 이리저리 틀어보다 결국 강변을 걷게 되었다. 그 언니랑 자식 하교 시키는 동선이 비슷해서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한자리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대신 강변을 이리저리 걷겠다, 하는 마음으로 걷기를 시작했는데, 한 달 정도 걸으니 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40분 동안 뛰면 딱 5km를 완주할 수 있었다. 컨디션 좋은 날은 30분 초반대에도 5km를 다 뛰고 마무리 운동까지 할 수 있었다.

리는 동안  자꾸 달라졌다. 힘들어서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이 차츰 줄고 호흡이 편해졌다. 무엇보 달릴 동안엔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어지러운 시국도, 괴롭고 이해 안 가는 상식 밖의 행동도 달리는 시간 동안만큼은 모두 잊었다. 9월에서 12월까지 거의 매일 달리면서 자라나는 억새를, 겨울을 준비하는 철새를, 붉게 변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단풍잎을, 몇 번의 날갯짓으로 물고기를 채 내는 백로를 볼 수 있었다. 계절이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계절의 바뀜을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의 맛도, 냄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졌다.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서서히 그 결을 달리하는 것을, 공기가 점차 날카로워지고 단단해지는 것을 감각할 수 있었다.


다이소에서 귀에 걸 수 있는 목도리, 러닝용 장갑, 스포츠 양말을 구입하면서 어느새 내 달리기는 제법 진지한 선에 놓이게 되었다. 마라톤 경력이  되는 동생이, 신발만은 좋은 걸 신어야 한다며 운동화 사 줘서 이제 나도 형광색 운동화를 신고 달린다.

러너들한테 필수라는 비니 모자만큼은 거부하고 있는 중인데 언젠가는 내 머리에도 골무가 씌워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겨울에 칼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러너들을 보면 혼자 내적 친밀감이 넘쳐서 꾸벅 인사하고 싶지만 아직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고 있다(검색엔진에 러너들끼리 인사... 를 쳐보긴 했다).

 

그래도 이번 겨울은 그리 춥지 않다. 아직까지는.

아직은 달릴 수 있다.

달리기 시작한지 두달째, 12월 초 어느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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