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기대의 뺨을 날리는 일
3년 만에 세부 여행을 다시 계획했다... 가 아니라 딸려갔다. 동남아 통인 나의 배우자는 동남아 여행지 코스를 줄줄 외울 뿐만 아니라 엑셀로 여행계획 짜는 사람이라 나는 그냥 잘 딸려 다니면 된다. 단,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불평불만 않고 따라다녀야 한다. 불평을 내뱉는 순간 당신이 여행 계획에 대해 뭘 아냐며 엄청난 잔소리 세례를 받게 되니까. 입 꼭 다물기.
아무튼 이번 여행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최대한 오래 물속에 있기.
첫 번째 목적지는 오슬롭-수밀론 코스였다.
사실상 이번 여행을 필리핀으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오슬롭 방문에 있었다. 오슬롭은 자연 상태의 고래상어를 관찰할 수 있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곳이다. 나는 야생 고래상어의 섭식행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에 흥분했다. 관련 후기를 얼마나 많이 읽어봤는지 모른다. 고래상어의 푸르고 검은 등과 동그란 눈을 직접 볼 수 있다니, 하면서. 오래 두근거렸다.
하지만, 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거나 - 추락시킨다.
일단 밤비행기에서 거의 못 잔 데다-빈틈없는 만석에, 난기류를 통과해야 했다- 긴 줄을 서서 입국심사를 받자마자 4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려 이동해야 해서 너무 피로했다.
오슬롭에 도착해서는 새벽 4시부터 예비줄을 서서 본 줄을 서는 데 필요한 대기표를 받는데, 전 세계인이 시도하는 새치기를 막느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새벽 4시에도 줄이 길었는데, 그럼 대체 이 사람들은 몇 시에 와서 줄을 서 있었던 걸까 궁금하면서 안 궁금했다). 그때부터 모기와의 싸움. 모기들만 노 났다. 그나마 나-를 비롯한 아시아인들-는 래시가드로 완전무장했지만 비키니나 쇼츠만 입은 사람들은 완전 모기밥.
2시간여의 눈치싸움 끝에 겨우 좁은 보트에 올랐는데, 물에 젖은 배 표면이 미끄러워 몇 번 엎어졌다(나만 엎어진 건 아니다).
강마른 보트맨들이 영차영차 노를 저어 들어간 새벽의 바다는 차고 검었다. 고래상어를 유인하기 위해 뿌린 새우젓 탓에 시야가 매우 흐렸다. 사람들은 고래상어가 다가올 때마다 비명을 질렀는데, 비명엔 공포와 놀람이 서려있어 거대한 생명체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님을 여실히 드러냈다. 프리다이빙의 열풍 때문인지 모두가 롱핀을 차고 말도 안 되는 수영을 하고 있었고...
수면 가까이에서 기갈 들린 듯 물과 새우젓을 빨아들이는 고래상어는 너무 거대해서 머리부터 꼬리까지 한 번에 볼 수도 없었다. 네모지게 벌린 입 속으로 엄청난 양의 물이 회오리치며 빨려 들어갔다. 희고 커다란 고래상어 배 밑에는 빨판상어 수십 마리가 매달려 콩고물을 주워 먹고 있었다. 고래상어가 정신없이 아침 식사를 하면서 꼬리를 요동치다 애매하게 근처에 있던 내 몸을 치고 지나갔는데, 피부결(살결? 표면?)이 수세미처럼 거칠고 딱딱해 깜짝 놀랐다. 부지불식간에 내가 상어를 발로 찰까 봐 겁도 났다(그러면 벌금이 엄청남).
새벽부터 줄을 서서 겨우 시작한 체험? 관찰? 은 뭐가 뭔지 모르겠는 상태에서 30분 만에 끝났다. 고래상어 아침 식탁에 던져졌다 끌려 나온 기분.
아무튼 그래서 오슬롭 고래상어 투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천신만고'.
몽롱한 정신으로 수밀론으로 이동했고,
결과적으로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수밀론이 훨씬 좋았다. 여행이란 참 웃기는 것이다.
바위틈을 어슬렁거리는 아기상어와 함께 헤엄치고, 물결에 따라 천천히 흔들리는 연산호와 그 연산호에서 고개를 내미는 니모-사실 흰동가리인데, 정말 호기심이 많은 물살이다. 니모에 대해선 다음에 더 써보기로 한다-를 보고, 바다에서 돋아나는 해를 보았다(새벽 5시에 일어나는 어린이 덕분 -.-). 햇살이 처음 스며들기 시작한 아침 바다를 헤엄치는 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회복을 일으키는 일이기도 했다.
물속에 머무는 시간 동안 나는 지친 몸과 마음을 정련할 수 있었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자기 전까지 짜고 미지근한 바닷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파도가 얼굴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 여전히 남아 출렁이는 파도 침대에 누운 것 같은 이상한 기분으로 잠들어 심해를 헤엄치는 꿈을 꿨다.
물 꿈을 꾸면서도 오줌은 안 쌌다.
난...
어른이니까.
아직 정신이 일상에 제대로 갖다 붙진 못했지만, 그래도
오늘부터 차근차근 여행기록을 해나갈 생각이다. 그러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