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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Aug 13. 2022

삽살개 스타일이 대세인 평행우주

곱슬머리에 대한 고찰

내 털 이야기를 하자면 머리카락 얘기가 빠질 수 없다. 나는 미용실에서 '악성 곱슬'에 분류되는 머리다. 머리가 조금만 길면 마치 미용실에서 “단단하게 말아주세요!”라고 백 번 외쳐 완성한 머리같이 결을 따라 마구 꼬인다.


내 머리를 참 싫어했다. 조금만 길어지면 온갖 방향으로 꼬이는 데다 습기 찬 날이면 붕 떠올라 안면을 내가 원치 않 방향으로 지나치게 돋보이게 한다. 여름엔 최악이다. 드라마 추노 주인공 머리 그 자체가 되니까.

그래서 열세 살 때부터 서른넷이 될 때까지 4개월마다 스트레이트 펌을 해 왔다.

그때부터 미용실에 바 돈을 계산해보자면 천만 원에 이르며, 미용실 의자에 바쳐진 시간은 500시간에 이른다. 이십 년 전에 홍대의 무슨 스트레이트 전문점에 가서  20만 원 주고 머리를 편 적도 있다! 커트가 5~7천 원 하던 때였다. 아, 직모에 미친 자여. 

계속 스트레이트를 해대니 머리카락이 얇아지고 약해져 또 영양을 넣었다가 매니큐어를 했다가 게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다 서른넷이 되던 해. 탈코르셋을 알게 됐다. <탈코 일기>를 읽은 게 먼저였는지 <탈코르셋:도래한 상상>을 읽은 게 먼저였는지 아니면 트위터에서 긴 머리를 잘라 기부 인증하는 여자들의 트윗을 본 게 먼저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허리까지 머리를 기르기 위해 해마다 50만 원에 육박하는 돈과 스무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쏟아왔는데. 긴 목줄이 잘려나간 듯한 쇼트커트 여자들의 목덜미가 시원해 보였다.  


그래도 긴 머리를 바로는 못 잘라냈다. 찔끔찔끔 어깨선에 맞춰 잘랐다가 짧은 단발을 했다가 1년을 망설인 끝에 드디어 목덜미가 드러나는 길이로 잘랐다. 머리가 짧아지니 매그넘 볼륨 마스카라나 핫핑크 립스틱, 복숭아 물빛 블러셔 같은 게 다 안 어울렸다. 랑콤 디올 입생 로랑 등 브랜드마다 갖고 있던 립스틱이 얹힌 얼굴이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결국 안 쓰게 됐는데, 아까워서 파우치에 쟁여두다 이사할 때서야 우루루 쓰레기통에 쏟아 버렸다.


머리 스타일이란 거, 참 신기하다. 몸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인데 사람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진짜 많이 미친다. 머리가 길 땐 찰떡같이 어울렸던 허리를 끈으로 졸라매는 시폰 원피스나, 발목에서 찰랑거리던 맥시드레스, 10센티 꽃무늬 웨지힐들이 다 어색해졌다. 옷 스펙트럼이 서서히 달라졌다. 이제는 단정한 슬랙스나 어깨선이 곧은 리넨 남방 같은 것들이 옷장을 메운다.


그리고 웃기게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머리가 됐다. 길 가던 사람이 물은 적도 있다. 파마 어디서 했길래 이렇게 자연스러워요?

여름엔 곱슬이 힘을 좀 내서 더 탱글하게, 겨울엔 좀 힘이 빠져서 차분하게 스타일이 정리된다. 둘째 낳고 머리가 많이 빠져서 묶으면 한 줌도 안 돼 속상했는데 지금은 곱슬 파워로 머리숱이 많아 보인다.


곱슬 때문에 미용실에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 머리 관리법을 정리해 둔 <꼽쓰리>란 유명 인터넷 카페에도 가입했다. 그 카페에서 나 정도 머리는 볼륨 매직 수준이었다. 카페지기이 유튜버인 박채소님의 아름다운 곱슬머리와 섬세한 관리법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 역시 곱슬머리는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져선 안 되었던 거야. 귀하게 돌보아야 했던 거라구.


그렇게 서른 중반에, 드디어, 곱슬 쇼트커트 스타일에 정착했다.

미용실에 바쳐진 내 볼륨 스트레이트 비용들이여. 엉덩이가 아프도록 앉아서 봤던 우먼센스들이여. 곱슬머리에 관련된 깊은 사색들이여. 모두 안녕.


그런데 올해 여름, 운동장에서 놀다 앞머리가 젖어 뛰어오는 첫째의 머리가... 변했다. 히피펌 한지 3개월 정도 지난 삽살개 같은 스타일이랄까. 아가 때는 생머리여서 얜 내 머리를 안 닮았네, 했는데 어있던 곱슬 슈퍼파워가 각성한거다. 한 번 각성한 슈퍼파워는 날로 힘이 세져서 어제는 나이아가라 펌 스타일이었다가 오늘은 호일펌 스타일로 변신했다.

이제는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여러 애 중에 우리 애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여름의 습기를 머금어 하늘로 치솟으며 힘을 뻗치는 곱슬머리가 내 아이를 참으로... 돋보이게 한다.

너 같은 머리는 엄마처럼 짧게 치는 게 나을 걸, 하고 슬쩍 운을 띄웠는데 씨알도 안 먹힌다. 본인은 허리까지 머리를 기를 거라면서.


그래.... 자기 머리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나보다 좀 더 진한 곱슬을 가진 첫째의 머리가 길어지면 과연 어떤 형상을 갖게 될지 기대가 된다. 그래. 삽살개 헤어 스타일이 대세인 평행우주도 어딘가엔 반드시 있을 거야. 우린 시크함 말고 귀여움으로 승부를 보자. 일단 이번 여름을 굽슬굽슬 구불구불 잘 지내면 머리가 쑥 길어 있겠지. 어린이용 컬크림을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전 세계 수백만 곱슬인들 파이팅. 장마 전선이 지나갈 때 우리 곱슬은 더 고불거리고, 더 아름다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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