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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Aug 18. 2022

모두가 나간 빈 집

달다 달아 꿀 달다

드디어 첫째가 개학했다.

6시 반쯤 일어나서 한 시간쯤 책 읽고, 7시 반쯤 밥 먹고, 8시쯤 가방 메고 집을 나선다.

알아서 척척 하는 모습이 제법 1학년 체모를 갖춘 듯해 사랑이 막 샘솟았다. 동그란 이마에 쪽, 입을 맞추자 첫째는 싱긋 웃음을 물고 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 안녕, 하면서.


둘째는 좀 문젠데, 혼자서 아무것도 안  파다. 누워서 뒹굴거리는 놈 내복 벗기고 겉옷 입히고 의자에 앉힌 뒤 밥 떠먹이고 양치시키고 유치원 가방을 메 줘야 겨우 집을 나서는 스타일. 그래도 짜증 한 번 안 내고 시중을 들었다. 왜냐. 오늘은 드디어 혼자 있을 수 있는 4시간이 주어지는 날이니까.


9시쯤 둘째 등원니 진짜 혼자가 되었다.


빈 차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다. 뽀로로 노래 말고 영지 노래, 카디비 노래! 주 신경 안 쓰고 큰소리로 욕이 잔뜩 든 카디비 노래를 따라 불렀다. 절로 흥이 난다. 오쿠루루루루.


한 달 만에 요가원에 갔더니 내가 제일 부러운 사람이 되었다. 9시 20분 반은 애기 엄마들이 주 멤버인데 개학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다른 학교들은 다음 주 개학. 후후후히후. 오랜만에 가서 전굴도 후굴도 다 잘 안됐지만 웃으면서 했다. 혼자 요가하는 이 자유, 달다 달아.

집에서는 매트 펴고 동작 하나 할라치면 내 몸을 덮치는 두 아기 때문에 될 일도 안됐다. 지금은 그냥 나 혼자 뭐든지 할 수 있다!

요가 끝나고도 시간이 남아 혼자 밥을 먹었다. 무려 혼자! 밥을! 삼십 분이나 먹었다. 맨밥에 간장만 비볐는데도 맛있다.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밥을 먹을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떨렸다.


그렇게 한시 반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자식의 개학을 이다지도 기뻐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이다지도 좋아하는 엄마라니. 좀 찔린다. 그래도 어디 책에서 읽은 문장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덜어내 본다. 인간은 24시간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마땅히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내용. 정말 옳으신 말씀이다.


공교육의 따듯한 비호 아래 점심까지 먹고 돌아온 첫째의 얼굴이 말갛다. 오랜만에 학교 가니 저도 재밌었단다. 그네도 타고, 도마뱀도 봤단다. 아. 고마워라. 선생님도, 학교도, 급식도 너무너무 고맙다.  

내일도 자식들이 교육기관에 가준다는 사실이 진짜 너무 감사하다. 나도 혼자 있으면서 뒹굴방굴하며 책도 읽고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니 오랜만에 몸이 가뿐하다. 애들 대할 때도 웃음으로 대하게 된다. 개학, 진짜 감사하다. 태어나서  공교육에 이렇게 감사한 적은 처음이다.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 아직 무너지지 않았군요.


아무튼.

빈집에 들어와서 마스크와 바지를 동시에 벗을 때, 기분 진짜 째지게 좋다.

오늘 같이 개학날을 보낸 첫째네 학교 양육자들은 다 공감할 거다.

애 하교 기다리면서 오랜만에 본 엄마들의 얼굴들이 밝다.

다 내 맘 같았겠지.

내일이 금요일이라서, 내일 하루 더 학교 갈 날이 남아서, 혼자 밥 먹을 수 있는 기회가 한번 더 남아서 너무 좋다.

다가올 긴긴 겨울방학까지 이 마음 잘 쌓아 두어야지.

지금도 나는 웃고 있다. 흐. 흐.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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