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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Aug 21. 2022

우리 진짜 그렇게 살진 말자

꼰대 알아보는 법

 오랜 친구와 대화를 시작하면 지리한 주변 얘기는 생략고 순식간에 마음 속 깊이 있는 얘기를 하게 된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 가볍게 건 전화에서 우리는 금세 생활의 가장 깊숙한 얘기 들어갔. 내 쪽에선 불안증 얘기라든지, 심리 상담 진척 상황을 얘기했고 친구 쪽에선 묵은 부모님 문제나 남들한테 말 못 하는 배우자의 답답한 부분을 말했다.

오늘도 코로나 시대에 애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잠시 얘기하다, 치졸해서 차마 대놓고 말할 순 없는- 서로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공통의 지인에 대한 기였다.


그 지인(이하 A언니)은 매사 시원시원하고 당찬 데가 있어 우리 둘 다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가면서 A언니는 좀, 이상하게 변했다.

자기 의견 똑 부러지게 말한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다른 사람 기분을 생각지 않고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쪽으로 굳어갔다. 일 추진을 시원시원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일이 언니 뜻대로 안 되면 강제로라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틀어야만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나이차가 열 살도 넘게 나는 사람에게 00 씨,라고 부르며 거침없이 심부름 비슷한 걸 시켰다. 또, 자기 애들이랑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애 둘 있는 집에 자기 애들을 떠맡기고 배우자와 영화를 보러 갔다. 친하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하면서.


그렇게 언니가 조금씩 불편해지던 중, 언니가 밥이나 한 끼 먹자며 불러냈다. 식사 자리에서 언니는 오래 다닌 직장 이야기를 꺼냈다. 후배가 성추행을 당하고 상사를 고소했는데 증거 불충분으로 최종 패소했다며 후배의 미욱함을 탓하는 얘기였다. 실패한 선례를 남겼다면서, 그렇게 패소하면 다음에 다른 누군가가 성추행당하더라도 승소하기 더 어렵다는 거였다. '이왕 하는 거 이겼어야지, 못 이길 거면 소송을 걸질 말았어야지'하며 쯧쯧 혀를 찼다.

거기서 내가 핀이 나갔다.

"언니, 무슨 소리예요. 그럼 성추행 당하고도 승소 못할 것 같으면 아예 고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승패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상사가 성추행하는 사람이라는 걸 회사 사람들이 소송 과정에서 알겠죠. 그리고 성추행당한 사람이 용기 내서 고소를 했는데 패소했으면 얼마나 절망스럽겠어요. 그 후배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상사를 고소하기까지 어려움이 오죽 많았겠어요."

언니 말을 잘 따르던 내가 평소와 다르게 다른 입장을 내세우자 언니는 언짢아하더니 '그러든 말든, 세상은 결과로만 이야기하는 거야'하며 대화를 강제종료해버렸다.


그리고 곧 언니는 한 다단계 브랜드의 열성 신자가 되었다. 쿠킹 클래스를 연다고 초대해서 가보면 다단계 제품 시연을 했고 이 제품이 얼마나 친환경적인지 열렬히 홍보했다. 언니는 한 번에 백만 원 이백만 원어치 물건을 산, 이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본 자기 지인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A언니를 따랐던 우리는 애써 물품 몇 가지를 사들였지만 언니 성에 찰 만큼 돈을 쓰진 못했다. 다단계 포인트가 그리 높지 않은 세제나 수세미 정도를 사들였던 우리는 언니와의 관계에서 서서히 정리되었다. 사업에 도움 안 되는 동생들로 카테고리가 새롭게 분류돼버린 것 같았다.


제품 홍보만 끊임없이 올리는 언니의 인스타 피드를 보면서 친구는 서글퍼다고 했다. 언니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제품 사라는 연락 말고는 오지 않는다고, 제품 카탈로그같은 광고 문자 말곤 보내지 않는다고 슬퍼했다. 내가 어, 나도 그런데, 하면서 서로 씁쓸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친구한테는 언니 어떻게 하면 다단계 VIP가 되는지 알려준다며 차로 1시간 거리의 옆 도시까지 자기랑 강연 들으러 가자고 끈덕지게 조른다고 했다.

아주 다단계 쟁이가 돼버렸어, 하고 친구는 오래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했다.


야.

우리 진짜 그런 사람은 되지 말자.

서로, 딱 보고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으면 가감 없이 말해주기로 하자.

마흔 넘어서 꼰대 같은 소리, 다른 사람 배려 안 하는 소리, 라 같은 소리 하면 듣는 즉시 말해주기로 하자.

얘가 상처받으면 어쩌나, 뭐 그런 생각 절대 하지 말고 바로 말해주기로 하자.

너 꼰대 같아, 너 이상해졌어, 하고.

그 말 듣고 절대 삐치거나 하지 말고 곧장 정신 차리는 걸로 하자.


우리는 전화기 너머로 가상의 손가락을 걸고 굳게 굳게 약속했다.


동생들한테 슬픔을 안겨주는 그런 언니는 되지 말자고. 나이 들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여는 그런 언니가 되자고.


그런데...

동갑인 우리가 마흔 넘어서 둘 다 꼰대 돼서, 서로 이상한지 아닌지 못 알아보게 되면 어떡하지.

나이 먹을수록 제대로 조언해주는 사람이 줄어들 텐데.

저 사람 나이 먹더니 변했네, 이런 소리 듣는 사람 되기 정말 싫다. 벌써 꼰대 같은 소리 하고 다니고 있었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한 가지는 안다.

'나는 진짜 꼰대 아니야! 나는 젊고, 젊은 사람들하고 소통도 잘되고~'하는 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사람, '우리 팀엔 진짜 꼰대 없어. 다들 나에게 잘해주는 걸'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진짜 꼰대일 확률이 아주 높다는 걸.


진짜 진짜 꼭 하고 싶은 말,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말이라서 이 말만은 꼭 해줘야지, 하는 말도 그냥 입 꼭 다물고 하지 말라는 어떤 현인의 조언이 기억난다.

그래.

진짜.

나이 들수록 꼭,

입을 다물어야지.

하고 싶은 말이 넘쳐흐르면 글로 써야겠다.

글 꼰대는 말 꼰대보다 좀 덜 보기 싫지 않으려나.


에잇. 이러나저러나 나이 들면서 꼰대되긴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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