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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Aug 29. 2022

살려고 쓴다

노는 여자라고 하길래,

" 이제 애 학교 가고 집에서 노니 좋겠다."

격조했던 친구한테 연락이 왔기에 반가워하며 받았는데 괴랄한 말만 줄창 내뱉았다. 내가 대답을 않자 떠들다 지풀에 지는지 전화를 끊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부엌에 황망히 서 있다 벽에 묻은 기름 얼룩이 눈에 띄어 얼른 행주에 물을 묻혀 닦았다. 얼룩을 닦으면서도 하도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음이 새 나왔다.

더 웃긴 건 내가 별 반박을 안/못했다는 거다. 반박이 안 나온 연고를 따져보자면 반은 기가 막혀서였고 반은 내가 노는 시간이 있긴 있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6시 반에 일어나서 밥 먹이고 애들 등원시키고 나면 첫째 하교 때까지 4시간 정도 시간이 생기긴 다. 그 시간 보통 요가를 하러 가거나 장을 본다. 그러고 집에 오면 청소하고 빨래 돌리고 애들 하교시켜서 도서관 쏘다니다 저녁 챙겨 먹이고, 애들 다 재우고 나서 자정까지 과외하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서 내가 '논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배우자에겐 출퇴근 시간이 있지만 나한텐 그런 시간이 없다. 그런데 '노는 시간'은 있다.


'노는 여자'라.

애 낳은 여자가 애를 돌보거나 식사를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같은 여자들끼리도 소위 '빻은 말'을 잘 주고받는다. '야. 오늘 저녁거리는 뭐 차리니. 반찬 아직도 잘 못해? 그래서 남편이 일할 때 힘이나 쓰겠어?', '얘, 너 남편이 넉넉히 안 벌어 오니. 집에서 살림이나 열심히 하지 밤에 뭔 과외수업을 한다고 그래. 너 그러다 몸 상한다.'

칭찬과 비난과 은근한 자기 과시를 곁들인 이런 조언들. 내가 달라하지 않았는데 먼저 쥐어주는, 도를 믿습니까, 하고 물어보면서 주는 말라버린 물티슈 같은 그런 말들, 진짜 진짜 노 땡큐, 아임 오케이다.


얼마 전 글쓰기 모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글쓰기 모임 멤버 모두 힘든 여름을 통과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집안일 때문에 결국 참석조차 못했다. 다른 사람 위로해주고 그럴 상황이 다들 아니었고 각자 삶을 감당하기도 힘든,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참, 진짜 위로는 왜 힘든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건지.


내가 글쓰기 모임하고 영어 스터디 나가고 요가원 가고 그런 거, 세상 사람들은 팔자 좋게 낮에 노는 아줌마로밖에 안 본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내 삶에 첨언한다, 이런 얘기를 털어놓자

"수현 씨, 방학 때 하루 종일 혼자 애 보고 집안일하고 밥하고 과외하고, 글까지 매일 쓰는 거, 그거 살려고 그렇게 하는 거 알아요. 수현 씨 살려고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거잖아요. 살려고 몸부림치는 거잖아요."

이런 말을 한 분에게 들었다.


그동안 계속 울고 싶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모르겠었다. 길가다가 아무 일 없이 누가 어깨라도 치고 지나가면 이때다 싶어 울 참이었다. 하루하루 울음의 끝을 물고 버텼다. 밤에 베개를 베고 누우면 주책없는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유 모를 눈물이다, 하면서 옷자락으로 슥슥 닦아냈는데 내 고통의 꼭짓점을 나만큼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회원 분이 꼭 집어준 것이다.


살려고,

살려고

온몸을 흔들고 부딪고 있다.


애들과 24시간 붙어있었던 8월 한 달간 14권의 책을 새로 읽었고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 애들이 태권도장에 간 40분 만에 일단 뭐라도 쓰고 또 썼다. 쓰고 싶었던 말을 차마 다 풀어쓰지 못해 답답했던 글도 있었고, 계속 속으로 생각해왔던 내용이라 금세 뚝딱 쓰고 여러 번 고칠 시간이 나왔던 글도 있었다. 글을 쓰는 날이든 못 쓰는 날이든 매일 글 쓰는 마음만은 놓지 않았다. 글쓰기라도 안 붙들고 있으면 내 존재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애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글조차 안 쓰면 진짜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 같아서 그랬다. 부지런해서, 책을 너무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살려고 그랬다. 살고 싶어서. 정말 살고 싶어서.


브런치 작가 고운님이 말했다. '올가미 같은 일상'이라고.


음.

올가미 같은 일상.


살만한 사람들 입에선 위로가 잘 안 나온다. 진심이 잘 묻지 않고 물과 기름처럼 배배 돌기만 한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의 입에서만, 삶의 고초가 정신과 육신을 꿰뚫고 꼬치처럼 흔들거리며 겨우 살아가는 사람의 입에서만 뾰족하게 핵심을 꼭 짚는 위로가 나올 수 있다.


나도 10년 정도만 견디고 나면 누군가에게 진심이 듬뿍 묻은 위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넌 노니까 좋겠다'같은 소리 하는 사람과는 우주만큼 먼 거리를 갖고 살고 있겠지. 세월이 흐를수록 상대의 고통을 좀 더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될 거다. 지금도 남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죽을 둥 살 둥 버티고 있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니까. 그래서 함께 마음 아프고 슬퍼 오늘 오랜 시간 엎드려 베갯잇을 적셨으니까. 이 정도면 '노는 여자'라기엔 너무 바쁘고 사회적이지 않나.


감정에 젖어서가 아니라, 극히 이성적이어서, 여러 합리적인 판단을 거쳐 봤을 때 세태가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 자꾸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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