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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Aug 30. 2022

노는 여자

놀고 놀고 또 노는 여자들

‘노는 여자’     


이 두 단어가 연결되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학창 시절이라면 성적으로 문란한 아이라는 의미를, 청년 시절이라면 제대로 취업하지 못한 백수라는 의미를, 결혼해 아기를 낳고 나서라면 전업 주부로 살림을 하거나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여자는, 아니 나는 논다. 놀고 또 논다. 등에 빨간딱지를 붙이고서.


노는 여자.

결혼해서 집안 살림을 꾸리는 사람.


'논다'에 해당하는 행위.

식재료를 사서 다듬고, 냉장고를 채우고, 정리하고, 날 것의 식재료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내고, 그 부산물들을 또 정리하고, 그릇들을 씻고, 기름때가 묻은 후드도 씻고, 청소기로 머리카락들을 빨아들이고, 걸레로 닦고, 그 걸레를 또 빠는 일.

소재별로 옷을 분류해 세탁망에 넣은 뒤 빨래를 돌리고, 널고, 개서 서랍 별로 넣는 일.

화장실의 물곰팡이와 더러워진 변기를 락스로 청소하고, 깨끗한 수건을 넣어 놓고, 휴지와 칫솔과 치약과 비누들이 떨어지지 않게 채우는 일.

침구를 빨고 털고 때로 베갯잇과 이불보를 바꾸는 일.

자식을 등하교시키고, 한글을 가르치고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 문제를 풀리고 여름엔 물놀이터를 전전하며 겨울엔 도서관을 전전하는 일.

일상에서 발생하는 돌발 변수들을 매일 혼자서 책임지고 관리하는 일.


갓난아기를 키우고 있어도, 그 아기가 밤새 울어 잠 한 숨 자지 못해도, 혼자서 화장실에 5분도 있지 못해도, 그 아이를 홈플러스나 백화점에 데려가 시간이라도 보낼라치면 나는 (팔자 좋게) 노는 여자, 맘충이 된다.

혹여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도(도대체 아기를 언제 보내야 할까? 돌 전에 보내면 독한 년, 돌 이후에 보내면 말도 못 하는 아기를 보낸 못된 년, 두 돌 이후에 보내도 자기 애 자기가 돌보지 않는 게으른 년이 되니.) 그 빈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몰라 또 노는 여자가 된다. 어린이집에 아기가 가 있는 시간은 10시부터 3시. 그 시간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도 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에도(공부할 돈은 또 어디서 나오나?), 직장을 나가기에도(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누가 돌봐주나?) 애매한 낮 시간.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안일하다 보면 11시. 아침 겸 점심 먹고 나면 12시. 밤새 못 잤으니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나면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뭐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애도 어린이집 갔는데 왜 돈도 안 벌고 놀기만 해?라는 비난의 감옥에 갇혀서.


미 이성경 대표님이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도 좀 대놓고 놀자.

남편이 회사 가서 커리어를 쌓을 동안, 우리는 관계를 쌓자.

당당하게 브런치 좀 먹자.

집에서 내가 하는 일을 남편이 하는 일과 맞노동으로 치고 금액으로 환산하면 한 달에 삼백에서 오백 가까이를 벌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브런치 정도는 맘 놓고 먹어도 되는 거 아니냐."


다 옳으신 말씀이라 고개 백번 끄덕이며 들었는데, 들을 때는 정말 맞는 말이라고 깊이깊이 생각했는데, 왜 난 낮에 혼자 책 들고 카페 가는 내 모습이 자꾸 죄스러워질까. 남들이 보면 저 아줌마 참 팔자 좋게 논다, 할 것만 같을까. 아니 대체 남이 뭐라든 그게 어떻다고.

티브이나 책에서 비난조로 그려지는 카페에서 잡담하며 시간을 보내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내 모습인양 자꾸 움츠러들고 초라해진다.

애초에 맞벌이를 할 수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놓고, 이제 애 낳고 키우셔야지요, 하며 권고사직을 시켜 놓고 정말 대놓고 본격적으로 집안 살림만 하면서 '놀기'시작하면 맘충 딱지가 붙는다.

내가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었다면 남이 뭐라든 내 할 일 다 했다 싶으면 누가 뭐라든 맘 편히 '놀'겠지만 애초에 그런 인간으로 생겨먹질 않았다. 직장 안/못 다니고 집안일을 할 거면 집 전체가 먼지 한 톨 없어야 할 것 같고, 이왕 주부로서 요리를 할 거면 9첩 반상을 차려야 할 것 같다.


난 그렇게는 못 한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누구든 완벽한 살림꾼이 될 수 없다.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직장인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듯이, 살림도 분야가 너무나도 넓고 다양하기에 그 모든 방면에서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안팎으로 쏟아지는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다.


며칠째 비가 오는 바람에 빨래를 못한 것에 마음이 쓰이지만.

빨래 바구니에 넘쳐나는 더러운 옷들이 나더러 '노는 여자'면서 살림조차 똑바로 못하고 있지 않니, 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지만.

내가 매일 글 쓰는 시간이 누군가에겐 '노는'시간을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도 그저 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썼다.


여자의 삶을, 나의 삶을 쓰다 보면 늘 명치끝이 아려오고 가슴이 답답해지지만,

그래도 쓴다.

그게 내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하게 옳고 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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