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독특했던 성조를 기억해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썼던 우리

by 수현씨


탕웨이를 들으러 갔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가 '굿모닝'을 말할 때

나는 탕웨이의 영어 사용 방식에 마음이 흔들린다.

아름다운 언어사용자라고밖에 할 수 없다. 탕웨이가 말할 때마다 긴장됐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예측이 안돼서. 한국어를 사용할 때도 가슴이 떨렸다.

마침내,라고 발음할 때 그의 입술은 품위 있게 움직였고, 연기가 아닌 것 같았다. 세상은 멸망해버리고 격조 있는 탕웨이의 목소리와 나만이 어두운 영화관에 남은 것 같은 느낌으로 2시간 즈음을 보냈다.




국제학교에서 근무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2개 국어를 썼다. 외국인 선생님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공통 언어로 사용했다. 캐나다에서 오신 분, 중국에서 오신 분, 일본에서 오신 분 모두 다른 성조로 영어를 '사용'했다. 그들만의 영어를 듣는 것이 좋았다. 나도 나만의 경상도식 영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외국인 선생님 중 텍사스에서 온 교포가 있었다. 미술 담당이었는데 자주 내 교실을 찾아왔다. 둘 다 수업이 빈 시간, 그는 내 교실에 찾아와 나란히 앉아 마룬 5의 sundaymorning을 오래 듣고 갔다. 그런 시간들을 몇 주 쌓은 후 마침내 우리는 둘만 따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약속한 날 그는 밤 9시까지 무작정 날 기다리게 했다. 그래도 기다렸다. 처음부터 내가 더 많이 좋아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그가 영어를 쓰는 방식과 단어를 선택하는 태도가 좋았다. 2세대 교포라서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 한국말을 사용할 때는 목소리가 바뀌었다. 영어를 독특하게 번역한 한국말을 썼다. Crazy night walk,를 이상한 밤 산책, 이런 식으로 번역해서 나에게 말하곤 했다. 한국말 쓰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제대로 뉘앙스 전달을 못한다고. 영화 속 탕웨이처럼, 어색한 한국말을 할 땐 자꾸 웃었다.


그는 제멋대로였고 약속도 자주 펑크 냈다. 하지만 만났을 땐 나에게 집중했고 집에 초대해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줬으며 귀가 빨개지면서까지 기타 연주를 해줬다. 만났을 때만큼은 서툰 방식으로 자주 사랑을 표한하는 '단일한'사람이었다. 이 설명이 개쓰레기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전형적인 문장이란 것을 잘 안다. 자주 헷갈렸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이 사람이 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태도 때문에 더 매달리게 되는 건지. 연락이 오지 않고 나를 오래 내버려 두면 그 사람 번호를 차단했다가 얼마간 지나면 혼자 풀었다가 했다. 차단을 풀면 어김없이 연락이 오곤 했다. 왜 연락 안 받아? 같은 말로 순식간에 날 흔들어놨다. 그 사람 연락에 감정이 널뛰기하는 걸 참을 수 없어서 혼자 '헤어질 결심'을 했다. 박찬욱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헤어질 결심'이란 건 헤어진 상태가 아니다. 나 혼자 다짐한 것이다. 이 사람과 계속 시간을 보냈다가는 내가 상실되고야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서로 연락하지 말자, 하곤 마지막 데이트 겸 오래 강가를 걷고 헤어졌다.

그런 식으로 헤어진 것을 지금은 후회한다. 그 사람한테 좀 더 솔직했으면 후회라도 없었을 것이다.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보다 내가 널 훨씬 더 많이 좋아해서, 그 간극을 견딜 수 없어서 헤어져.라고 말했으면 좋았겠다. 미국인들은 clingy 한 여자를 싫어한대서 쿨한 척하느라 너무 애썼다. 그 사람 마음의 마음을 질척 질척하게 만드는 여자 중 하나로 전락하지 않고 싶어서 너무 많은 것을 참았다. 주말마다 연락이 없는 것이 이태원의 클럽에 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관계를 끊고 나서, 아니다 싶으면 칼같이 끊어내기 잘하는 내가 왜 그렇게 답지 않게 굴었을까 하고 한참을 생각해봤다. 그 답을 찾지 못했는데 오늘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사람의, 나를 대할 때만 사용하는 그 특유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던 거라고. 남 앞에선 좀처럼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는 그 사람이 나에게 정말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내 앞에서만 몇 마디 더듬더듬 발음했던 그 성조를 잃고 싶지 않았었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는 타이틀은 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절실한 울림을 갖고 있다. 그러나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이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아니면 외국어를 잘 말할 수 없어 슬프다는 건 아니다. 물론 조금은 그럴지 몰라도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연유인지 내게 자명성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과 비슷한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한 사람의 작가로서, 나는 아마도 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끌어안고 계속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가 한국말을 사용할 때마다, 내가 영어를 사용할 때마다 우리 사이에서는 이윽고 작은 슬픔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 없었던 건지도.




영화는 사실 잘 이해하지 못했다. 탕웨이의 행동도, 박해일의 행동도 잘 이해가 안 됐다. 몇 번 다시 보면 좀 더 이해의 조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런 영화가 있다. 처음 볼 때 영혼까지 떨며 보았기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돌려 볼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도 알았다.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지는 못할 거라는 걸. 그래서 탕웨이의 흔들리지만 꼿꼿한 눈빛, 중국말을 내뱉을 때의 어깨 움직임 같은 것을 눈에 새기듯이 보았다. 좁은 영화관 의자에서 무릎을 안고 미동 없이 스크린만 쳐다보았다. 지금도 그의 목소리 울림이 내 안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잉크처럼 퍼지는 슬픔을 견디며 이 글을 썼다. 불쌍한 여자, 불쌍한 여자, 그 단어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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