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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ul 30. 2022

일곱 살인데 쉬는 어떻게 닦죠

눈코입만 달린 애들이 학교에 간다니

간밤에 잠시 네이버에 들어갔는데,  미래세대의 출산 시기를 당기기 위해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낮추겠다는 기사를 보고 가슴이 터졌다.

출산 시기를 당기기 위해서 학령기를 바꾼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인간에게 산란기 뭐 이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다 현실적인 걱정이 덮쳤다. 12시에 하교하는 애를 맞벌이 부모가 어떻게 돌보나. 유치원은 5시까지도 무상으로 돌봐주는데. 학교 돌봄 교실 운영도 허황된 소리다. 애들 100% 수용이 불가능하니까. 그러면서 교사 임용 수는 오히려 줄이겠다고 하고. 오줌도 혼자 뒤처리 못하는 애들을 학교에 입학시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나는 80년대에 태어나 빠른 연생으로 7세에 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는 발달 정도가 한 달 차이도 큰데, 8살들 사이에서 반 애들의 성장에 따라가지 못해 애를 많이 먹었다. 사회성도 아무래도 떨어지고 나보다 1년이나 더 나이 먹은 애들과 같은 반에 있으니 여러모로 덜떨어진 애로 주눅 들어 자랐다. 부모님은 학교에 1년 먼저 보낸 것을 내내 후회하셨다. 초등시절 내내 암울했던 기억이 많아 내 자식대에는 '빠른 연생'같은 게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목을 빨며 잠든 둘째 학령기가 정부 첫 시도 해에 딱 걸린다. 8세인 첫째 1학년 시중드는 일도 힘에 부쳤는데 둘째가 7세 때 입학하게 되면 내 커리어는 중단되어야 할 것이고 초등생 뒷바라지에 인생을 쏟아야 할 것이다.

 불어난 입학 정원으로 인한 여파를 겪을 것이다. 그 해 대학 입시 경쟁률이 높아질 것이고, 졸업 후 취업난도 전 해보다 험하게 겪어야 할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너무 어렵다. 적극적으로 구조를 깨뜨리는데 일조하지 않았던 과거와 현재가 죄스럽다. 사회가 경력단절 여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두고 철 모르는 누군가 그 함정에 빠지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기혼여성이자 페미니스트인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연대해야 한다고 결연히 부르짖었지만, 앞으로 도대체 어떤 식의 연대를 해야 할지 당장 현실의 육아가 무섭고 무거워 오늘 밤은 정말 막막하기만 하다.


나혜석 선생님이라면, 리베카 솔닛이라면 무슨 말씀을  해주셨을까. 아니 어떤 행동을 하셨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둘째의 뺨을 쓸어본다.


마음이 아프다.


30대가 넘어서야 페미니즘을 만났고, 매트릭스의 빨간 약을 먹은 것처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들이 약자 및 소수자의 인권을 후려치는 프레임 안에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내 배우자도, 내 자식들도 이 기울어진 세상 속에서 바르게 살아가게 하려고,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꿔 보려고 많은 것을 시도했고 또 많은 것을 포기했다. 출산 후 재취업이 안 되더라도 이 작은 도시, 경상도라는 틀 안에서 면접 문화 및 여성 채용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구조의 모순을 이제야 깨달았기에  틀 안에서라도 가부장제를 타파하려, 적어도 내 작은 가정 안에서만큼은 그 틀 안에 갇히지 않으려, 내 자식이 살아갈 미래를 바꾸려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하며 매일을 견디고 있는데.


진창에 발목이 깊이 빠진 느낌이다.


모든 여성은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다.

아직 소수자 인권이나 성별로 인한 차별을 모르는 여성들조차도,

심지어 그들이 지금은 구조 안에서 그 구조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돕고 있더라도.


하지만 너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연대를 꿈꾸는 건 허상이 아닐까? 차라리 연대를 과감히 포기하고 각자의 삶에서 느끼는 불평등을 극복해나가려 개인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걸까?


출산율 운운하는 기사 밑에 '기혼여성은 가부장제의 부역자다'라고 누군가 쓴 댓글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애초에 출산율이 아니라 출생율이라고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날 때부터 소수자의 인권,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의 문화는 강자를 두둔하고 강자의 편에 서게 가르친다. 약자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검열한다. 약자다운 행동을 하고 있는지, 피해자다운 행동을 하고 있는지 2차 검열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으면 자연스레 기울어진 편에 서게 되는 것처럼.


그 누구도 처음부터 '깨어 있었던' 사람은 없다. 다만 어떤 계기를 통해 먼저 깨달을 기회를 얻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뿐.  


리베카 솔닛이 말한 것처럼,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은 결국 모두 함께 연대하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아직도 생각한다. 너무 순진하고 연약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정희진 작가님도 모든 사람들과 연대를 어떻게 이룹니까, 하고 일갈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연대는 이런 거다. 각자 현재 자신의 삶 안에서 매일의 최선을 다하여, 개인이 단독으로 극복하기는 어려운 이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함께 조금씩 깨는 것. 이렇게 페미니즘이라는 민감한 이슈로 글을 써 올리는 것도 연대의 일환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인권주의, 여성주의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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