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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Aug 08. 2022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글은 쓰기를 마음먹기까지 짧은 시간이 걸리는 반면, 어떤 글은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루며 힘들게 쓰기를 시작하게 된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읽기도 힘겨웠고, 적용도 마찬가지였고, 그 모두를 한데 버무려 글쓰기까지 끌고 오기가 참 어려웠다.      


공지영 작가 글을 읽다 보면 본인은 글을 수월하게 써내는 편인데도 어떤 글은 참 쓰기가 어려워서 몇 시간이고 컴퓨터에 있는 지뢰 찾기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곤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까지 수많은 다른 책과 웹툰과 기억에도 남지 않는 기사들을 찾아 읽으며 어떻게든 시간을 끌었다. 그 이유는, 이 책으로 인해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바뀌는 중이고. 그래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거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은 인간 해방이다. 노예 상태였던 자신을 진정한 자유인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


“인류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였고, 모든 해방은 자기 해방이었습니다. 흑인 해방은 흑인이 이룬 것이고, 여성 해방은 여성이 거둔 것입니다(162쪽)”. “내 안에 있는 노예 감독관과 정치 투쟁을 개시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까지 다시 분해하고, 체질하고, 점검하고, 분리하고, 조합해야 합니다.(130쪽)” “우리 스스로를 종속 변수로 보는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임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바뀌는 상황에 무조건 적응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잘못된 상태를 바꿀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용기와 비전이 없을 뿐입니다.(254쪽)”      


학습에 의한, 관습에 의한 굴종. 내가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나와 내 자식이 ‘열심히’ 배우면 세상에 뒤처지지 않고 발맞추어갈 수 있을지 생각하며 자아를 종속 변수로 낮춘다. 개인의 생각과 가치관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지 못한 것이다. 나에게는 비전이 있으나 용기가 부족했고, 비전조차 확실하지 못했다.    

  


소외


지금까지 나는 소외를 배제나 따돌림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 소외, 동물 소외, 약자 소외는 결국 ‘전복’에 그 핵심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현대인의 소외는 현대인이 고립되고 배제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이 뒤집어져 있다는 것이다. 학생이 공부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은, 학생이 공부에게 지배당하고 공부가 학생 개인의 권리나 인격보다 더 앞서 있어서 ‘뒤집어져’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소외 현상은, 인권보다 돈이나 물질적 가치가 더 우위에 있어 올바르고 정당한 가치가 뒤집어져 있다는 뜻이다.      

주위에서 끊임없이 소외된 것들을 본다. 쿠팡 노동자의 쉴 권리보다 빠른 배송으로 인해 버는 돈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군대에 복무하고 싶은 사람의 희망과 노력보다 군대의 ‘남성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이 임신하거나 출산할 권리보다 회사에 충성하고 실적을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소외된다. 그런 의미에서 변희수 하사의 자살은 자살이라 할 수조차 없다. 사회적 타살이다.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렸을 때 그들을 받쳐 줄 사회적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살은 사회적 문제이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152, 149쪽).” 한 해에도 여러 차례 발생하는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도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인재(人災)이다.     


사회가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자살한 사람들에 대한 통렬한 책임감을 느끼고 환경을 함께 바꾸고자 연대하지 못했던 것에 숨이 끊어질 때까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 반성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고.  

   

“지금의 미투 운동, 페미니즘 등을 이끄는 여성 운동 세력은 좀 더 조직 역량을 강화하고, 문제의식을 첨예화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떠안고 있습니다. 한국의 남성 문화는 남성 가해자 몇몇의 개인의 도덕성을 비난하거나 단죄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위주의 문화, 그중에서도 … 병명 문화, 군사 문화, 폭력 문화 등을 사회적 공론장에 올려놓아야 하고(138쪽)”.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여성 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알고 있으나,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어떻게 조직 역량을 강화해야 할지 막막했다. 수도권에서 일어나는 끝장 토론, 페미니즘 연구 모임, 여성 민우회에서 주관하는 각종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여성 혐오 범죄-성폭력, 성추행, 살인 및 살인 미수-에 대한 뉴스를 읽고 혼자 분개하는 일에서 나아가 어떻게 문제의식을 첨예화할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계속하여 읽고 쓰는 수밖에 없다. 시대적 과제를 떠안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인간의 성을 억압하면 할수록, 그 개인은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117쪽)”.


 우리 지역에서 제일 큰 도서관은, 나다움 책을 사서 선생님 뒷자리로 모조리 빼두었다. 아동에게 ‘유해할 수 있다’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란다(이 책은 도서관 안에서만 볼 수 있어요! 부모님이 같이 오셔서 내용 확인하시고 아이들에게 보여주세요!라는 문구가 빨갛고 큰 스티커 형식으로 책 전면에 붙어 있다). 그래서 모조리 빌려와 읽어 보았다. <엄마 인권 선언>, <아빠 인권 선언>, <딸 인권 선언>,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놀랍고도 진실한 이야기>. 대체 어떤 부분이 유해하다고 느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 인권 선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화장실에서 책을 읽을 때 조용히 혼자 있을 권리. 통화 중에는 방해받지 않을 권리. 혼자 산책을 나갈 수 있는 권리. 밥 차리고 애들 보고 잠드는 일상을 우습게 취급당하지 않을 권리. 모든 인간처럼 자유롭게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권리. 소녀, 자매, 여자, 부인, 이모, 고모, 할머니, 누구이든 간에.” 아빠 인권 선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육아 휴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집에 머물며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권리. 운동이나 수리를 잘 못해도 될 권리. 직장이나 돈 문제, 심지어 건강 문제가 있을 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도 될 권리. 떨어진 단추를 달고 다림질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식기를 정돈하고, 아픈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권리.”


 대체 이 내용의 어느 부분이 ‘유해’하다고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남성과 여성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내용이라서?(삽화에 성소수자 커플 그림이 있다/엄마 그림에 아이를 돌보는 일을 괴로워하며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부분이 있다) 나는 전혀 유해함을 느끼지 못해 자식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아빠도 실수하고 잘 모를 수 있다, 울고 싶을 수 있다는 것을 같이 이야기했고 자식도 별문제 없이 받아들인 듯하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지만, 성의 형태와 내용은 다양하며 윤리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공론장에 올려놓고 싶다(성범죄 제외). “성교육의 첫 번째 목표는 성을 윤리적으로 비판하지 않을 것(117쪽)”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민주주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강한 자아를 가진 개인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성의 단면만을 학습하거나 N번방같은 악한 경로로 성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성에 대해 개방적으로 이야기하는 환경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로 어색할 수는 있겠지만.     


교육


“한국인으로서 우리들이 받은 교육은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권을 경시하고 끊임없는 경쟁과 희생을 강요하는 교육이었습니다. 그것은 교육이라기보다 반교육에 가까운 것(95쪽)”, “독일 선생님은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마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배후를 의심해라,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성숙한 민주시민이 된다고 가르칩니다(67쪽)”, “한국에서는 법률가, 언론인, 교수가 과잉 대표되어 있습니다(98쪽)”.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아이가 있다. 처음 그 아이와 학부모가 함께 상담에 와서 교육방향을 의논할 때 아이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하자, 아이의 엄마가 딱 잘라 이야기한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고작 선생님 시키려고 너 과외까지 해주는 거 아니다.”      


‘선생님’인 내 앞에서 하기에는 무례한 말이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사회가 검사나 변호사, 판사, 의사, 아나운서 등을 직업의 ‘우위’에 둔다는 것을 자명하게 알 수 있는 발언이었다. 직업에는 우열이 있다는 것. 1등인 아이도, 꼴등인 아이도 사실 직업을 ‘함부로’ 고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사건이었다.  

    

“왜 꼭 직업을 가져야 되지? 왜 꼭 돈을 벌어야 되지? 그런 강박관념도 일종의 억압이라 할 수 있습니다(54쪽).”


 내가 하는 사교육은 사실 교육이라기보다 반교육에 가깝다. 성적의 우열을 강조하고, 잠잘 시간을 줄여서라도 5지선다 문제를 더 풀지 않으면 게으른 학생이라고 야단친다. 잠을 덜 자고 친구와 덜 놀고 기출문제를 더 많이 풀면 ‘착한’ 학생이라고 칭찬한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봤다. “학생이 공부를 더 하고 덜 하고는 학생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바르고 착하다는 판단은 학생이 하는 공부량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가이다.”


민주주의


“저는 진부란 정치적 좌위 개념을 넘어서 보다 넓은 의미에서 ‘고통과 억압에 대한 민감성’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 보스는 대개 고통과 억압보다는 권력과 질서에 민감하지요(137쪽).” “자본주의는 실업과 불평등을 필연적으로 낳는 체제입니다. 한국이 엄청난 불평등과 실업문제 때문에 지옥으로 치닫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필연적인 결과이지, 특정 정부의 정책 실패 때문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5~8퍼센트의 실업을 내장하고 있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실업을 개인의 탓으로 돌립니다. 게을러서, 공부를 안 해서 … (167쪽)” 수구-보수 과두지배이자 약탈적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남한을 어떻게 인간화할 것인가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우리에게 있어 통일의 가장 큰 문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악한 지정학적 환경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빈곤한 상상력과 굴종적인 태도(235쪽)”라고 말한 저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전쟁국가라는 것이 불러온 과열된 경쟁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통일에 대해 모두가 발언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개인으로서 당당하게 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강한 자아를 가진 자가 되고 싶다. 약자를 무시하고, 내가 가진 권력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휘두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자식과 내 친구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지면, 우리 사회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소외받는 사람이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너무 연약하고 이상적일 수 있겠지만, 나만의 미래 가능성이자 포부이다. 오늘도 아내를 살해하고 장모를 찌른 남성의 기사를 보며 또 한 번 좌절했지만, 낙망을 한 발짝 디디고 올라 오늘을 살아간다.

어딘가로라도 나아가고 있을 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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