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강의가 바다를 건너간 날

by 오종민

경찰청 동료 강사로 활동하며 늘 가슴 한편에 품고 있던 작은 로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주도 강사 초빙'이었다. 강연 명목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묵묵히 내 자리를 지키던 2023년 여름, 드디어 그 꿈이 현실로 찾아왔다.


나는 여러 분야의 전문 강사로 활동 중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살예방 강의였다. 어느 날 본청 복지 담당자로부터 뜻밖의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개인적인 연락이 드문 터라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짧은 안부 끝에 날아온 질문은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혹시… 레크리에이션 강의도 가능하신가요?"


비슷한 진행을 해본 경험도 있었고, 조금만 더 다듬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곧이어 담당자는 9월 제주에서 열리는 '공상(공무상 상해) 경찰관 힐링캠프'에서 5일 중 첫날 2시간의 아이스브레이킹을 맡아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제주'라는 단어에 속으로 환호성이 터질 뻔했지만, 짐짓 베테랑의 여유를 가장하며 "당연히 가능합니다"라고 확답을 건넸다.


내게 주어진 준비 기간은 한 달. 수많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고, 트렌디하게 가보자는 생각에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신서유기>의 게임들을 떠올렸다. 레크리에이션 전문 서적을 탐독하고 유튜브로 진행 호흡을 연구했다. 노트북 바탕화면에 흥미진진한 게임 자료가 하나둘 쌓여갈수록 ‘이 정도면 완벽하다’는 자신감도 덩달아 차올랐다.


마침내 디데이. 집합 장소인 제주공항 5번 게이트에 도착했다. 잠시 후 본청 담당자가 일행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고, 캐리어를 끌고 모여드는 참가자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평균 연령대 50대 이상. 게다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온 공상 경찰관 선배님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제주도의 맑은 하늘과 대비되는 짙고 무거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 망했다.' 최신 예능용 게임 위주로 잔뜩 준비해 온 내 패기가 원망스러웠다. 공항 주차장 버스에 올라타면서도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고, 심장은 통제할 수 없이 요동쳤다. 손발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과연 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호응을 끌어낼 수 있을까?'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가 맡은 역할은 5일간 동고동락할 이 어색하고 지친 사람들을 가장 빠르게 무장해제 시키는 것이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할 수 있다.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강의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5명씩 네 개의 조로 나뉜 참가자들이 조용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긴장한 기색을 들키면 끝이었다. 나는 특유의 넉살과 가장 밝은 미소로 첫인사를 건넸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뻔뻔하고 능청스럽게 준비한 프로그램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어라? 이게 여기서 터진다고?" 엉뚱한 오답이 튀어나온 순간,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강의장에 일순간 폭소가 터졌다. 한 번 웃음보가 터지자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들도 마법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의 눈빛은 점점 적극적인 장난기로 반짝였고, 나는 진짜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빙의된 것처럼 신나게 농담을 던지며 현장의 열기를 쥐락펴락했다.


그 두 시간의 치열하고도 유쾌한 사투 덕분에, 첫날부터 팀원들 사이의 어색한 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5일간의 캠프 내내 그들은 오랜 친구처럼 깊이 교감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헤어짐을 앞둔 회식 자리, 몇몇 분들이 다가와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강사님 덕분에 굳어있던 마음이 참 많이 편해졌습니다." "첫날 그렇게 맘껏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몰라요. 덕분에 좋은 동료들을 얻었습니다."


그 진심 어린 눈빛을 마주한 순간, 뭉클함이 차올랐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5일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내가 그들에게 힐링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의 따뜻한 호응이 내 안의 긴장과 두려움을 치유해 준 진정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강의는 인연의 바람을 타고 온다. 단, 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완벽하지 않더라도 온 마음을 다해 부딪혀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그것이 또 다른 귀한 인연으로 이어진다. 오랫동안 품어온 제주 강의의 꿈은 나에게 '소통의 진정한 의미'라는 잊지 못할 선물을 남겨준 채 그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