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크고 작은 수많은 위기와 맞닥뜨립니다.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급하게 화장실을 찾아야 하는 웃지 못할 소소한 위기부터, 감당하기 힘든 뼈아픈 실수로 벼랑 끝에 몰리는 중대한 위기까지 그 형태도 무게도 제각각입니다.
하지만 인생을 길게 놓고 보았을 때 정작 중요한 것은 '위기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 위기가 닥친 순간, 우리가 어떤 '태도'를 선택하느냐입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 시간이 알아서 덮어주길 바라며 숨어버리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타인에게 분노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피하고 싶은 현실을 냉정하게 직면하여 대응책을 세우고, 기어코 그 위기를 기회로 뒤집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위기 앞에서 주로 어떤 태도를 취하셨나요? 고백하건대, 저 역시 경찰 생활을 하며 숱한 위기 앞에서 도망친 적이 있습니다. 핏대를 세우며 남 탓을 해본 적도 있고, 모른 척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알량한 선택은 단 한 번도 상황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관계에 깊은 흉터를 남겼고, 제 마음 한구석에는 씻기지 않는 찜찜한 패배감만 켜켜이 쌓일 뿐이었습니다.
그 뼈아픈 진실을 가장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은 2015년, 중앙경찰학교 강단에 섰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졸업한 모교에서 까마득한 후배 경찰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제 가슴은 전날 밤부터 터질 듯 설레었습니다. 마치 금의환향하는 기분이었죠. 하지만 1교시 수업이 중반을 넘어갈 무렵, 그 벅찬 설렘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강단 위 제 시야에는 꾸벅꾸벅 조는 후배, 낄낄대며 떠드는 후배, 책상 밑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후배들의 모습이 노골적으로 들어왔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집중하는 이들도 분명 있었지만, 이미 평정심을 잃은 제 시선은 딴짓하는 몇몇 후배들에게만 매섭게 꽂혀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마이크를 쥔 채 날 선 목소리를 뱉어내고 말았습니다. "선배가 멀리서 시간 내어 왔는데, 강의를 듣는 태도가 이게 뭡니까? 여러분, 일선 현장에 나가서도 그따위 태도로 임할 겁니까?"
순간, 교실의 공기는 살얼음판처럼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당황한 채 저를 향했고,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저는 쫓기듯 1교시를 황급히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쉬는 시간, 도망치듯 빠져나와 화장실 거울 앞에 섰습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든 순간, 거울 속에는 화가 난 선배가 아니라 참을 수 없이 옹졸하고 부끄러운 삼류 강사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후배들이 몰입하지 못한 것이 과연 그들만의 잘못이었을까?’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제 이야기 속으로 흠뻑 끌어들이지 못한 제 강의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저는 강사로서의 제 무능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선배'라는 권위를 빌려 후배들에게 모든 책임을 비겁하게 떠넘기려 했던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뒤통수를 친 순간, 제게는 또 다른 거대한 위기가 닥쳤습니다. 당장 10분 뒤에 시작될 2교시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심을 굳히고 다시 강단에 섰습니다. 2교시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저는 후배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집중하지 못한 건 제 강의가 그만큼 지루했기 때문인데, 강사인 제가 부족했던 탓을 후배님들의 태도 탓으로 돌렸습니다. 제 경솔함을 사과드립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얼어붙어 있던 교실의 공기가 봄눈 녹듯 따뜻하게 풀리더니, 후배들의 눈빛이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제 진심 어린 사과에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고, 오히려 1교시보다 훨씬 더 뜨거운 호응과 집중력으로 제 강의를 채워주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박수 속에서 강의를 마친 후, 제 마음에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을 때 책임을 회피하려 들면, 며칠 밤낮을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제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원인을 분석하고 나면, 그 끔찍했던 위기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 단단한 내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무겁고 피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겪어보니 알겠습니다. 책임은 도망치려 등 돌릴 때만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질 뿐, 용기 내어 정면으로 마주 안으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는 것을요.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이 말이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생존'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를 둘러싼 위기를 정면으로 직시할 때, 우리는 호랑이 굴속에서도 기어코 성장의 무기를 쥐고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위기는 포장지만 험악할 뿐, 속내는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찾아온 '또 다른 이름의 기회'입니다. 결국 그 호랑이 굴을 끔찍한 무덤으로 만들지, 눈부신 성장의 디딤돌로 만들지를 결정하는 것은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용기 있는 태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