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분명히 밑줄까지 쳐가며 읽었는데, 오늘 아침이면 머릿속이 하얗게 리셋되는 경험. 다들 한 번쯤 겪어보셨을 겁니다. 저 역시 수없이 좌절했습니다. 책장만 덮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내용 때문에 '내 기억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독서가 과연 의미가 있나' 의심했던 적도 많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똑같은 책이라도 '강의 준비'라는 렌즈를 끼고 읽으면 상황이 180도 달라집니다. 활자들이 살아서 머릿속에 쏙쏙 박히고,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박동합니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때면, 한 번 스쳐 지나갔던 지식에 제 경험과 살이 덧붙여져 저도 모르게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혼자 책상머리에서 고군분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몰입입니다.
이런 '가르침의 마법'은 비단 책상 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파출소 팀에 막내가 새로 들어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막내 위로는 1년 먼저 들어온, 눈치도 빠르고 일 처리도 매서운 이른바 '에이스' 선임이 있었습니다. 그 뛰어난 선임과 비교되다 보니, 업무 습득이 다소 느리고 서툴렀던 막내는 자연스레 '일 못하는 직원'이라는 아픈 꼬리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스 선임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고, 경찰 업무가 처음인 타 부서 출신 직원이 우리 팀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막내가 그 직원의 사수가 되어 업무를 가르쳐야 하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선배들은 내심 불안한 마음에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후임 앞에서 얼버무릴 수 없었던 막내는 '내가 먼저 완벽히 알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눈빛부터 달라졌습니다. 밤낮없이 매뉴얼을 파고들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악착같이 업무에 매달렸습니다. 후임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막내의 업무 속도와 정확도는 눈에 띄게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어느새 그동안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든든한 제 몫을 해내는 경찰로 훌쩍 성장해 있었습니다.
23년 동안 거친 치안 현장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강단에 서 온 저 역시 뼈저리게 느끼는 진리입니다.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이를 '프로테제 효과(Protégé Effect)'라고 부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행위 자체가 학습자 본인에게 가장 강력한 배움의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지식이나 감각적인 현장 경험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서론-본론-결론이라는 논리적 뼈대에 맞춰 재조립해야 합니다. 남을 납득시키기 위해 인과관계를 따지고 복잡한 개념을 소화하기 쉽게 잘게 쪼개는 과정에서, 비로소 흩어진 정보들은 촘촘하게 엮여 단단한 '나만의 철학'과 '체계'로 완성됩니다.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끼시나요? 책을 읽고 공부를 해도 남는 것이 없어 답답하신가요? 그렇다면 오늘 당장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 보시길 바랍니다. 거창한 강단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알게 된 지식, 내가 깨달은 작은 통찰을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직장 동료에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툭 던지듯 이야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타인에게 나의 언어로 전달하는 그 짧은 순간, 허공을 떠돌던 지식은 비로소 여러분의 피와 살이 될 것입니다.가르침은 남을 향한 베풂이 아니라, 나를 향한 가장 위대한 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