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으로 내성적이고 친구도 없던 내가 한 친구를 만나 성격을 바꾸기 위한 시도를 하면서 자존감도 올라갔다. 그러자 성적도 덩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영어, 수학이 가장 많이 올랐다. 한 번은 국, 영, 수 과목만 따로 시험을 쳤는데 전교 500명 중 46위를 했다. 중, 고등학교 통틀어 가장 좋은 성적이었고 나를 포함해 주변 모두가 놀아워했다. 부모님도 당연히 좋아하셨다. 살짝 기대치를 올리시는 듯한 느낌은 부담스러웠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성적이 오르자 대학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그런데 그 기대는 수능 모의고사로 인해 처참히 무너졌다. 93년도에 학력고사가 사라지고 수능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대학 진학을 위한 점수를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모의고사가 있었다. 그런데 모의고사 점수가 100점 언저리로 나왔다. 수능은 200점에 국어 60점, 수학 40점, 영어 40점, 사회·과학탐구 60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점에 100점대는 대학을 갈 수 없는 점수였다. '올리면 되지'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60점을 구성하고 있는 국어와 과학탐구 영역에 약했다. 40점짜리 수학과 영어를 잘 받아도 60점짜리가 취약하니 점수를 올리기 힘들었다. 기껏 올려봐야 110점대를 넘기기 힘들었다.
대학은 가고 싶었기에 재수까지 생각했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아버지가 지나가는 투로 “아빠 예전 꿈이 공군사관학교 가는 거였는데. 네가 한 번 사관학교에 도전해 볼래?"라고 말씀하셨다. 사관학교는 전교 10등 정도는 되어야 도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그땐 아버지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며칠 뒤 한 친구가 사관학교는 수능 시험을 치지 않는다고 했다. 솔깃했다. 안 그래도 수능이 문제였기에 그러면 어떤 시험을 치는지 궁금했다. 사관학교는 자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국, 영, 수 세 과목만 치르면 됐다. 희망이 보였다. '국, 영, 수만이라면 비벼볼 만 한데!'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곳이 해군 사관학교였다. 어차피 재수까지 생각했으니 한 번 해보기로 맘먹었다.
공부를 시작한 때는 94년 여름, 역대 최고의 무더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더웠고 에어컨도 없을 때였다.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책상 앞에 앉아 땀을 뻘뻘 흘려가며 기출문제 위주로 공부했다. 그때 첨으로 나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리가 저릴 정도로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문제만 풀었다.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몰랐고 아버지가 한 번씩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방에 들어올 정도로 몰입했다. 어려워 보이는 수학 문제가 하나씩 풀려 나갈 때마다 희열이 느껴졌고 일말의 희망이 보였다. 문제는 국어였다. 수학과 영어는 점수가 오르는데 국어는 계속 제자리였다.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하기로 했다. 국어는 깔끔히 포기하고 수학과 영어에 더 집중했다.
수능 시험은 11월이고 사관학교 시험은 9월에 있었다. 원하지 않는 시간은 늘 빨리 흐른다. 시험 날이 다가왔고 부모님과 함께 시험장으로 향했다. 정문 앞에 많은 부모님이 초조한 얼굴로 자녀들을 들여보내고 있었다.
부모님을 뒤로하고 교실로 향했다. 책을 펴고 끝까지 한 자라도 더 보려고 하는 이들과 엎드려 휴식을 취하는 이들, 친구와 함께 왔는지 수다를 떠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 괜히 더 긴장되었다. 어차피 몇 자 더 본다고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마인드 컨트롤 하기로 했다.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하며 긴장을 풀었다.
시험지를 받자 그동안의 고생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한 만큼만 하자'라는 맘으로 문제를 풀었다. 국어는 역시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고 수학과 영어에 집중했다. 수학, 영어는 할만했다. 주관식까지 빈칸 없이 일단 다 채웠다. 시험이 끝난 후 밖으로 나가니 여기저기서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 이 번 시험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 나는 그렇게 어렵진 않았는데?' 감이 좋았고 살짝 기대감에 설렜다. 설레발 치면 안 되니 그냥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무더운 여름의 고생이 끝나니 후련했다. 그냥 그걸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