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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람이 사람을 바꾸다

by 오박사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빨을 해 넣고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에는 한 친구의 도움이 컸다. 고등학교 1학년 말 그 녀석의 존재를 알았다. 녀석은 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도 1년이 지나도록 녀석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워낙 존재감이 약해서 나에게 신경 쓰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녀석도 나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녀석은 공부, 운동 못하는 것이 없었고 성격도 나와 정 반대라서 친구도 많았다. 당연히 나 같은 놈과는 어울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과 내가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 그 계기는 우습게도 게임이다.

학기 말 모든 수업 일정이 끝나면 선생님들은 자유시간을 준다. 수업 시간에 교실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되었다. 할 게 없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집에 있던 부루마블 게임을 가져왔다. '지구마불 세계여행'이라는 프로그램과 비슷한 게임이다. 주사위를 돌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를 내 땅으로 만들고 가장 많은 땅과 돈을 가진 사람이 최종 승자가 되는 게임이다. 첨엔 옆자리 친구와 둘이 게임을 했는데 뒤에 있던 녀석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함께 하자고 말을 걸어왔다. 둘 보단 넷이 낫기에 뒷자리 녀석들과 넷이서 게임을 했다. 한 번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 스킵해 뒀다가 다음 수업시간에도 게임을 했고 심지어 저녁까지 이어서 했다. 게임에는 돈을 관리하는 은행장이 필요한데 그 역할은 늘 내가 맡았다. 그 게임으로 내가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은행장 역할을 너무 잘했다. 별것 아닌데 내 계산 속도에 친구들이 놀랐다. 덕분에 게임 진행 속도가 빨라져서 지루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나의 그런 점에 감탄했고 그때부터 나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우린 대화를 나눌수록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나는 녀석의 모든 능력을 부러워했고 녀석 또한 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것을 좋아했다. 녀석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면이 있어서 친구들과 자주 다퉜는데 나는 그것을 무리 없이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녀석이 돌이라면 나는 물이었다. 돌을 던지면 튕기지 않고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그냥 흡수되었다. 그래서 우린 싸울 일이 없었다. 그렇게 우린 절친이 되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2학년 때 우린 같은 반에 짝꿍까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부러웠던 나는 녀석의 모든 행동을 따라 하고 싶었다. 녀석은 주로 수학, 영어 공부에 집중했다. 다른 수업 시간에도 몰래 수학책을 펴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따라 했다. 은근히 재미있었다. 그때 처음 공부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운동을 좋아하던 녀석을 따라 농구, 축구도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어설프고 잘하지 못했지만 재미있었다. '친구들과 논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라는 것을 또 그때 처음 알았다. 녀석을 통해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녀석을 관찰하고 따라 했다.

내가 가장 바꾸고 싶은 것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세상 활달한 녀석이 어디서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신기하게도 어딜 가나 녀석은 붙임성 좋게 말을 걸었고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이발소, 슈퍼, 비디오방 등 어른들과도 스스럼없이 말을 섞었다. 이건 타고나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슈퍼에 가면 일부러 아주머니에게 한 마디를 던져봤다. 돌아오는 말에 말문이 막혔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봤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렇게 점점 말하는 능력을 키웠다. 그 덕에 대학에 가서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직장에서도 말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게임에서 은행장 역할을 하며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첨 알게 되었고 수학, 영어 공부를 따라 하며 자존감도 많이 올랐다. 그 친구로 인해 내 인생은 어두운 심연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가끔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설마 네가 00 이가?'라며 놀란다. 성격과 분위기가 정반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나도 누군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녀석의 이름은 '박영보' 고맙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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