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드보통의 불안을 읽고서
불안은 현대인의 그림자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시선과 비교의 무대 위에 오른다.
오늘도 잘 해내야 하고, 실수 없이 살아야 하며, 무언가를 ‘이뤄내야만’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그것이 우리를 조용히 잠식하는 불안의 본질이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신분제가 아닌 사회에 살지만,
그만큼 더 지위에 불안해하고, 더 많은 인정에 목마르다.”
우리의 불안은 종종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할까 봐,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감정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불안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감정을 지워내듯 단절하거나, 아예 사랑받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자기를 고립시키는 방법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보다 빠르면서도, 일시적일지라도 확실한 치유 방법으로 음악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뉴에이지 음악은 그 조용하고 단단한 위로로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 되어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물질주의가 극에 달하던 시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영성, 자연 회귀, 동양 사상, 명상과 요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흐름 속에서, “속도를 늦추자. 조용해지자. 마음을 들어보자.”는 메시지가 음악으로 옮겨졌고, 그렇게 뉴에이지 음악이 태어났다.
뉴에이지 음악은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음악이다. 이 음악 안에는 경쟁도, 절정도, 결론도 없다. 속도도 비교도 없다. 오직 자기만의 템포로, 느리고 여유롭게, 조용하고 고요하게 흘러갈 뿐이다.
대부분의 뉴에이지 음악은 가사가 없고 보컬보다는 악기 연주, 특히 피아노와 신디사이저, 그리고 바람과 자연의 물소리가 중심이다.
그 소리들은 청자의 귀를 넘어, 마음의 내면 깊숙이 닿는다. 그리고 그 조용한 선율은 말 없이 속삭인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너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해.”
그렇게 잔잔한 음악 안에서 요동치는 불안을 잠재운다. 그럼에도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는 불안이라면, 내 감정을 그대로 허용하고 불안을 조용히 껴안기도 한다.
“더 해야 한다, 더 이뤄야 한다.”
“더 크게 성공하고, 더 높이 비상해야 한다.”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인정받아야 한다.”
이런 사회의 채찍질과 내 안의 강박에서 잠시 멀어지고 싶을 때, 좋은 음악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불안을 없애려 애쓰는 대신, 그저 불안을 옆에 조용히 앉혀두는 것. 그것으로도 우리는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
불안으로 불안해서 오늘은 불안을 껴안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q4K6Uwjth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