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의 모든 이별에 관하여
몇 개월 전, 소개팅이 있었다.
첫만남이었지만 취미가 같았고 원했던 이상형에 가까웠던 상대는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만남은 첫날 이후 진전이 없었다. 며칠 간 혼자 안부를 물으며 다시 만날 기회를 찾으려 했으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모든 이별의 과정이 대부분 그러하듯 둘의 협상보다는 느닷없이 일방적인 한 사람의 통보로 이별을 선고하듯 내 만남도 역시나 한 사람의 침묵으로 막을 내렸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 그녀에게 새해 안부를 물었다. 시간이 주는 힘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몇 개월이 지나서 그녀는 나에게 가장 긴 문장을 써보냈다.
그때는 사정이 생겨서 연락을 하지 못했었다고. 죄송하다며 사과를 한다고.
그 사정은 어떤 사정인지 모른다. 다만 나는 그 사정밖에 있는 사람이어서 중요도나 감정을 줘야 하는 우선 순위 리스트에서 제외되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뿐이었다.
문득 생각났다.
며칠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숫자 1을 확인하면서. 숫자가 없어져도 응답이 없는 상황을 직시하며 나는 존재에 대해서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며, 슬픔을 앓았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났을 때 상대의 호감을 살 수없을 정도로 나는 이토록 무기력한 사람인가.
나를 다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감정이 차단될 수 있나 하는 것에 서러워 술을 마시고 서른 살 너머 혼자 펑펑 울었다. 펑펑. 쏟았다.
내 감정은 이미 그녀에게 집착하고 의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그녀의 일방적인 감정을 느끼며 나의 이런 우스운 행동조차 일방적인 욕심이라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크기만큼 상대가 나를 좋아해줘야 한다는 과도한 집착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고 나를 울게했다.
대다수의 만남의 과정들이 이러하기에 한 쪽은 등을 돌리고 떠나가고 한 쪽은 미련을 가지고 운다.
서로의 감정을 동등하게 나눌 수 있다면.
그런 만남이 있다면 그때는 가장 덜 울게 되는지도.
상대와 내 감정의 크기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기에 지금 내 감정의 수치가 100이라고 해서 상대도 100일 거라는 믿음은 버리는 것이 좋겠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아는 것.
사람에게 지나치게 욕심부리면 외로워진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뜨거운데 당신은 왜 이렇게 차갑냐고 호소하는 일은 어쩌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기대하지 않으려고 해도 기대하는 마음은 도무지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 아직 난, 감정을 다루는 뿌리가 덜 자랐다.
매번 사람들에게 욕심을 부리고 외로워진다.
글 사진 이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