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대한 환상을 품고 처음으로 파리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리에 오게 된 것은 순전히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대학교 때 우연히 보았던 <퐁네프의 연인들> 의 배경으로 나오는 퐁네프 다리를 그토록 걷고 싶어서였다. 20억원치의 폭죽을 터트렸던 곳.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사랑에 미쳐 뛰어 놀던 곳. 한 번쯤 저곳에 가보리라는 환상을 품고 있다가 불현듯 떠나온 것이다. 그러나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철, 더러운 거리. 와인 보틀을 끼고 먹는 노숙자의 인상은 잊혀지지 않는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자욱한 안개등. 부슬부슬 내리는 비. 골목을 비추는 네온 사인. 비를 내리는 파리를 걷고 있는 그날의 분위기는 여전히 잊을 수가 없다. 포도빛 하늘. 느리게 가는 시차. 어디를 들어가도 맛있는 빵집들. 그때부터 나는 파리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좋지 않는 인상을 지우고도 남을 만한 낭만이 파리에겐 있으니까.
비는 계속해서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내리는 비를 맞고도 우산을 사지 않은 건 온전히 파리의 비였기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파리에서 내리는 비를 한 번쯤은 맞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럴만한 낭만으로 떠나온 파리였으므로 정제되지 않은 도시의 분위기만큼 나 또한 정제되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비 내리는 파리는 어딘가 모르게 우울했고 스산했지만 강렬한 인상에 도취되어 있는 내 영혼은 센강을 걸으며 오랫동안 파리의 비를 맞고 있었다.
낭만이란 뒷 일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라고 했던가. 순간의 감정에 흠뻑 매료되어 짧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 한곳. 파리의 도시에는 그런 힘이 있다. 머리와 옷이 모두 젖어 생쥐가 되어가고 있음에도 파리의 비를 맞으며 뒷 일을 생각하지 않을 특권이 나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낭만스러운 일을 한 번쯤 저지르고, 젊음에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을 마음 껏 써보기에 적절한 곳. 그런 도시가 있다면 단연코 파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