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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Jan 26. 2016

인생을 조금은 멀리서 보기

-오세영의 ‘원시(遠視)’를 통해서


 



인간은 누구나 늙어갑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게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청춘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나이 중 가장 긴 나이가 서른입니다. 젊음의 끝자락에 서 있는 자리죠. 청춘의 끝과 중년의 관문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여자는 아직도 나의 청춘이 퇴색하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여자는 서른의 나이가 한참을 지나도 나이를 물으면 서른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서른이 넘은 나이를 인정하고 말하는 것은 대개 서른 중반이 되어서라고 합니다. 이제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세월은 그 나이를 인정하게 만드는 거죠. 외면에서든 내면에서든.  


하지만 요즘은 그 나이를 마흔으로 이야기 해야 할 거 같습니다.그만큼 자기관리를 잘하기 때문이죠.


사람이 스스로 '나이 듦'을 인정하게 되기까지 넘게 되는 고비가 있다고 합니다. 눈앞이 가물거려도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레스토랑 메뉴판을 멀찍이 들고 보는 일 같은 건 처음에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애써서 인정하지 않고, 또 외면하는 겁니다. 

그렇게 갈등하는 시기를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나이 듦'을 인정하게 되는 때가 옵니다. 


“아, 이제는 내게도 돋보기가 필요해.” 


그 진실을 앞에 앉은 사람에게 솔직히 털어놓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는  ‘젊은 척'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젊음에 집착하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무심한 세월을 막을 수 있는 육체는 없는 것이죠. 


‘보톡스’라는 약품으로 얼굴의 주름을 감춘다 해도 젊음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죠. 


젊음에 집착하는 애처로운 마음을 보게 될 뿐입니다. 


늙어가는 것이 꼭 손해 보는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만난 한 사업가는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자신은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합니다.


“내 청춘은 너무 끔찍했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빛나는 청춘의 시절, 그것은 지난 사람의 말입니다.


청춘은 부재와 결핍의 덩어리이기에 우울하고 어둡고 외롭고 괴롭고 분노가 차오르는 시절입니다.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쓰다 보니  손에는 작은 거 몇 개 쥐었을 뿐인데, 어느덧  자신의  청춘은 저 멀리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그때서야 사람은 청춘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시절이었음을 알게 되죠. 


청춘이었을 때는 그 시기가 지루하고 힘들고 어두웠고 한탄과 몸부림이었을 뿐인데,  지나서 보니 그 시절이 가진 것이 없었어도  좋았던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청춘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청춘의 시절엔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가 나이 들면서 펼쳐지기도 합니다. 잃은 만큼 얻는 것도 있는 것이죠. 세상을 그윽하게 보는 눈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청춘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다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깊이와 여유를 갖게도 하죠.



자연에서 피어난 꽃은 필 때나 질 때나 어떤 두려움이나 미련을 보이지 않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힘들게 꽃을 피웠더라도 질 때가 되면 문득 홀연히 추락해 버릴 뿐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홀연히 떠나가지 않고 조금 요란스럽습니다.


나이 드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다가 오히려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주접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늙고 추한 모습, ‘노추(老醜)’가 되는 거죠. 


 " ...추하지 않게 늙고 싶을 뿐이야."


한 선배가, 소망으로 한,  이 말은 참으로 인간적인 말입니다.  


당신이 젊다면 젊은 지대에서, 

나이가 들었다면 다시 청춘을 생각하게 하는 지금의 자리에서 

한 시인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고 생각하게 하는 시로 오늘의 편지를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 '완전한 삶인지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이 쌓이고 노력이 쌓여서 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만의 어떤 길이 완전으로 가는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멀리서 보는 법도 이제는 배워야 할 나이입니다.

아, 어느덧 이렇게 우리는 세상을 많이 살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추신:



오세영 시인은 서울대 국문과 교수입니다. 한국 시인협회장도 지냈죠.  하지만 민중시를 쓰지 않았기에 문단에서는 당신 표현대로 ‘왕따’를 당했고, 서울대에서는 학문하는 풍토에서 ‘시 나부랭이를 쓰는 일’은 외도이기에 경원시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오세영 시인이 알려진 겁니다. 

시인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우리가 알게 된 거죠. 


목소리가 크다고,  큰 목소리만큼  진실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걸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잠시 화려하고 큰 목소리에 눈이 갔다가

그  허무와 무상함에 돌아선 우리들에게 

시인이 낮은 목소리로 ‘삶의 진실’을 말하는 걸 뒤늦게 듣게 됩니다.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워, 

시인의 시를  한수 더 소개합니다. 





산다는 것은


                                   오세영




산다는 것은
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을
키우는 일이다.

땀과 눈물로 일군 하늘 밭에서
별 하나를 따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를 안아

기르는 일이다.

어느 가장 어두운 날 새벽

미명(未明)의 하늘을 열고 그 새
멀리 보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손 안에 꽃 한 송이를 남몰래
가꾸는 일이다.

그 꽃 시나브로 진 뒤 빈주먹으로
향기만을 가만히 쥐어 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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